저술

사랑과 정의

엉클창 2025. 1. 21. 22:50

 

IV
사랑은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Kjerlighed søger ikke sit Eget

  

[고전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자기애(自愛), 자기 중심적 사랑, 자기 병(自己病, Selvsyge) 혹은 사랑이 결여된 마음이 갖는 다른 이름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아니신가요?[i]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ii]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야 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처럼 완전해져야 하며, 하나님의 고유한 완전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iii]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자기 것을 구하신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것을 구하십니다.[iv]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구하시는 것이며, 모든 것을 주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v] 곧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셨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본이 되시고,[vi] 사람들을 자신께 이끄셔서[vii] 그들이 그를 닮아 그의 고유한 본질 안에서 참으로 그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viii] 그렇다면 그분께서도 자기 것을 구하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것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희생적 헌신 속에서 그분을 닮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 것을 구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것을 구한다’ 혹은 ‘자기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곧 헌신이고,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구하는 것은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구하며 자신이 사랑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헌신은 오히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을 구하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 되실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기 것을 구하지 않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떠한 인간도 사랑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분명히 그리고 거짓되게 자기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의 유일한 진정한 대상은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더 깊은 의미에서 어떠한 대상도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희생적 헌신의 실천을 마음속에 품고 (그것은 사실 어떤 특정한 실천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사랑은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기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는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은 단지 소유를 정의하는 하나의 관계적 구분일 뿐입니다. 따라서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면 자기 것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정의(正義, justice)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며, 동시에 각자에게 그의 몫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정의는 소유라는 개념을 다룹니다. 정의는 소유를 나누고 구분하며,[ix] 각자가 자신의 소유로 불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합니다. 또한,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구별하지 않으려는 자를 심판하고 처벌합니다.

이 나의 것이라는 개념은 법적으로 각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만약 어떤 사람이 정의가 허용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것을 추구한다면, 정의는 그를 비난하거나 책망할 근거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각자는 자신의 몫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몫을 빼앗기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이 발생할 때, 정의는 개입하여 이 공통의 안전을 지키려 합니다. 이 공통의 안전 속에서 각자는 자신이 정당하게 소유한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변화, 전복, 전쟁, 지진 또는 그와 같은 끔찍한 재앙이 닥치게 되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보장하고, 나의 것과 너의 것의 차이를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그 혼란 속에서 균형(Ligevægten)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정의는 결국 추(vægten, 저울)를 던져 버리고 절망하게 됩니다! 

끔찍한 광경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이, 비록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같은 혼란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사랑은 또한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건 중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동시에 가장 기쁜 사건입니다. 사랑은 변화입니다. 그것도 모든 변화 중 가장 놀라운 변화이며, 가장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변한다, 혹은 변화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혁명(Omvæltning)입니다. 그것도 가장 깊은 혁명이며, 가장 복된 혁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함께 혼란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복된 혼란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는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사랑 안에는 너와 나는 있지만, 나의 것과 너의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와 나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으며,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있으면 사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소유의 대명사는 너와 나로부터 생겨났으니, 따라서 너와 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할 법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너와 나가 있는 모든 곳에 나의 것과 너의 것이 존재하지만, 사랑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근본에서부터의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혁명이 깊을수록, 나의 것과 너의 것의 차이는 더욱 완전히 사라지며, 사랑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사랑의 완전함은 근본적으로, 그 안에 감추어진 나의 것과 너의 것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 사랑의 완전함은 혁명의 깊이에 본질적으로 의존합니다. 혁명이 깊어질수록 정의는 더욱 두려움에 떨며, 혁명이 깊어질수록 사랑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i] Er Gud ikke Kjerlighed?”라는 표현은 성경 요한일서 4 7-8절과 4 16절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강조한다. 이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일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ii] Han, som skabte Mennesket i sit Billede, at han maatte ligne ham”는 창세기 1 26-27절을 암시하고 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그분을 닮아야 한다는 신학적, 철학적 주제를 강조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점을 논의한다. 특히, “그를 닮는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적 닮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선함, 그리고 완전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도덕적, 영적 소명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초로 작용한다.

[iii] Vorde fuldkommen, som han er fuldkommen”은 마태복음 5 48절을 암시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48, Værer da fuldkomne, ligesom Eders Fader i Himlene er fuldkommen.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이 구절은 산상수훈의 일부로, 하나님의 완전함(사랑과 선함)을 인간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최종 목표로 제시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표현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완전성을 닮아가야 할 도덕적, 영적 소명을 강조한다. 이 ‘완전함’은 단순히 도덕적 무결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iv] “하나님께 고유한 것”, 즉 하나님만의 독특한 속성이나 하나님께만 속하는 본질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속한 완전함, 사랑, 선함과 같은 본질적 특성을 지칭하며, 이는 다른 어떤 존재도 동일하게 소유할 수 없는 고유한 성격임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의 문맥에서는 이 표현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여전히 하나님 고유의 본질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고유함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영적 이상으로 제시되며, 특히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여정으로 해석된다.

[v] 이 문장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분의 본질적 속성임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다가가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19: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vi]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자신이 행한 겸손과 섬김의 행위를 본보기로 제시하시는 장면이다. 키르케고르의 문맥에서는 “Forbilledet(본보기)가 단순히 예수님의 겸손한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따라야 할 사랑과 헌신의 삶,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삶의 지침으로 제시된다. 특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Forbilledet”이 되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분의 삶과 희생이 단순한 도덕적 본보기를 넘어서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소명을 포함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사랑과 헌신의 길을 걸어야 함을 뜻한다.

[vii]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 구절에서 “ophøjet fra jorden(땅에서 들리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궁극적으로 부활과 승천을 암시하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이 구절을 언급하는 맥락에서, For at drage Menneskene til sig(사람들을 내게로 이끌겠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인간을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로 이끄는 것임을 강조한다.

[viii] [17:6-10]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기도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키르케고르의 맥락에서, i Sandhed vorde hans Egne(참으로 그의 소유가 되다)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본질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외적인 순종을 넘어서, 내적 진리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은, 인간이 단순히 피조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 안에서 존재의 참된 목적을 발견하도록 초대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ix] Skifter og deler(나누고 구분하며)는 특히 유산 분배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고정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Skifter: 공정한 분배를 수행하다.

Deler: 각자에게 그의 몫을 나누어 주다.

 이 표현은 “retfærdighed(정의)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 각자에게 그의 정당한 몫을 보장하고 나누어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키르케고르의 글에서 이 표현은 정의가 수행하는 본질적 역할을 강조하며, 정의가 소유의 경계를 규정하고 유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유산을 분배하는 상황에서 “skifter og deler”는 각 상속인에게 그의 합당한 몫을 배분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정의의 이상적인 상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키르케고르의 논의에서 이는 사랑의 초월적 특성과 대비되며, 사랑은 이러한 소유의 구분을 넘어선다는 점이 강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