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1부 1장 A, C 해설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의 벌레는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이 구절은 실존성, 즉 현존의 지옥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그 관점에서 마가복음 9장 45–48절은 키르케고르의 실존론적 해석, 특히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말하는 절망의 불멸성(udødelighed i Fortvivlelse)과 깊이 있게 연결된다. 그가 말한 “절망은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명제는 마가복음의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가 죽지 않는” 지옥의 이미지와 실존적으로 맞닿아 있다. 아래에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겠다.
1. 마가복음 9:45–48 요약
예수께서 반복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 거기에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ὅπου ὁ σκώληξ αὐτῶν οὐ τελευτᾷ, καὶ τὸ πῦρ οὐ σβέννυται)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는 지옥의 형벌, 즉 종말론적 형벌의 영속성에 대한 묘사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의 실존론적 해석에서는 이 지옥의 형상이 실존의 상태로 현재화됩니다. 즉, 이 지옥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존재가 겪는 실존의 지옥, 곧 절망입니다.
2. 키르케고르의 해석: 죽을 수 없는 자에게 절망은 꺼지지 않는 불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절망은 존재할 수 없다. 절망은 죽을 수 없는 자의 병이다.”(SKS 11, 143–146)
그리고 이 문맥에서 마가복음 9장의 지옥의 불과 죽지 않는 벌레를 인용합니다. 이는 전통적 교리 해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음의 구조를 제시합니다:
전통적 지옥 해석 |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해석 |
물리적 장소 | 실존의 상태 |
죽은 후 형벌 | 현재, 죽음 이전의 상태 |
타오르는 불 | 꺼지지 않는 내적 고통 (절망) |
죽지 않는 벌레 | 자기기만과 자기자각의 끊임없는 갈등 |
즉, 절망은 “죽을 수 없는 자에게 주어진 끊임없는 자기의식의 고통”이며, 이 고통은 꺼지지 않고, 벌레처럼 갉아먹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경고는 단순히 미래의 저주가 아니라, 지금 나의 실존을 직면하라는 영원한 시간의 현재적 호출이 됩니다.
3. ‘스스로를 태울 수 없는 존재’란?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매우 독특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그는 자기를 태워버릴 수 없으며,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한다.”
이 말은 지옥불의 실체가 바로 자기에 대한 절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가 내 존재를 벗어던지고 싶어도, 내 자신을 파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기에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 속에 사는 것입니다.
4. 존재의 현재성에서 마가복음을 다시 읽기
예수의 말씀이 말하는 “손을 자르고”, “발을 버리고”, “눈을 뽑는” 과격한 요청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의 자기 실존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타협이 지옥(절망)의 시작이라는 것이죠.
이 구절은 마치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지금 회피하고 있다.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너의 존재는 불태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불은 너의 절망 속에서 꺼지지 않는다.”
✍ 정리
마가복음 9장 45–48절은 키르케고르의 실존론에 의해 다음과 같이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 지옥은 미래의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진리로부터 도피하는 자의 실존 상태이다.
- 꺼지지 않는 불은 자기를 부정하고도 끝낼 수 없는 실존의 고통, 곧 절망이다.
- 죽지 않는 벌레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자기기만의 형상이다.
- 절망은 죽을 수 없는 자의 병이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 존재의 벌거벗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메시지를 단순한 경고가 아닌 실존의 요청으로 들을 수 있게 해주며, 마가복음의 말씀을 회개의 현재성, 절망의 형상, 그리고 자기 진실에로의 부름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