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logica. Ældre«
B-fort.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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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기독교가 여전히 강한 유대교의 풍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달리 자주 관찰한 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무제한 은혜의 교리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예를 들어, 자기 중심주의(particularism)가 맹목적 숭배의 경계에 근접한 방식으로(슐레이어마허 참조), 유대인에게서 가장 강력한 형태로 나타난 것을 관찰한다면, 기독교의 보편주의 경향은 유태인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 분명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한 불만의 예는 법률에 많이 있다. 동시에 기독교에서 이 아주 본질적인 요소(보편주의)는 스스로 주장해야 한다. 그때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처음에는 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을 믿었다.) 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보살핌의 대상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기독교도에게는 어느 정도 특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했다. 이것이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의 이방인들을 감염시키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유대인과 관련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을 전체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기 중심주의는 국가와 지리에 따라 수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유대인이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자기 중심주의가 그런 식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큰 전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몇몇 개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1834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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τὴν ἄϕεσιν τῶν παϱαπτωμάτων[# 1 죄사함,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인용한 것임]이 표현은 칭의( justification)가 논의되는 곳에 항상 사용된다.[# 2 사도행전 3장 38-9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모세의 율법에서도 의를 얻을 수 없었던 모든 거슨 그리스도에 의해 칭의를 얻는다. 로마서 5:15, 고후 5:17-21도 보라.] 결과적으로 그것은 죄의 완화를 의미하는 것만큼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즉, 칭의의 행위로 인간은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의 죄와의 관계는 단절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그들의 후유증을 계속해서 잘 느낄 수 있다.
1834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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