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윤리다. 율법보다 더 엄격하다. 율법은 살인자를 살인자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해도 살인자라고 말한다. 율법은 간음한 자를 간음했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했다고 여긴다. 이 웃고 있는 잔인함에 머무느니 차라리 엄격한 율법에 남은 것이 나을 수도 있다.
2.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기독교는 잔인할 뿐만 아니라 엉터리다. 지킬 수도 없는 윤리를 제시하고 강요한다. 설교자는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회중에게 강요해야 한다. 사실, 산상수훈은 윤리학자들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이 엄밀하고도 비현실적인 윤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3. 산상수훈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No one can serve two masters).”(마 6:24)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문을 열고 밖을 나가보라.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역사에서 정몽주는 오직 한 주인만 섬기다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시조는 고려를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지만 정몽주는 한 주인만 섬긴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정몽주도 어렸을 때는 그의 부모를 섬겼을 것이고, 성장하며 공부할 때에는 그의 스승을 섬겼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정몽주도 그의 평생에 한 사람을 섬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4. 따라서 복음이 본문에서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조금 나을 것 같다. 차라리 “can not”보다는 “must not”이 적어도 해야 할 의무라도 있으니까. 한 주인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을 수 있으니까. 스스로 판단하라에서 키에르케고어는 이것을 “이해의 실족”이라고 말한다.
5. 그렇다면, 오직 한 주인을 섬긴 예가 이 세상에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한 주인을 섬긴 “모범”이 되기 위해, 부모도 없이, 조상도 없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한 주인을 섬긴 단 하나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
6. 하지만 이 모범을 따라가기에 인간은 가랑이가 찢어진다. 이것이 복음인가? 어떻게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는가? 기독교는 관대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지 않은가? 다시 한 번 지킬 수 없는 모범을 제시하는 건가?
7.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를 보라!”(마6:25이하) 이것은 기독교 관대함의 시작점이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다.
“내가 한 주인을 섬긴 유일한 예다. 나를 보라.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나를 닮으라.”
오히려, “저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한다.
8. 오직 한 주인을 섬기라고 말할 때, 주님은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한 주인을 섬긴 유일한 모범이 되기 위해 어떤 죽음을 당해야 할지, 그 삶에 어떤 고난이 펼쳐질지, 그의 앞에 어떤 치명적인 위험이 있는지 몰랐겠는가? 그러나 그런 치명적인 상황에서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를 보지마. 나를 보면 너무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까 이 순간에는 나를 생각하지 말고 저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봐봐.”
9. 이 이야기는 마치 농담 같다. 이 농담 같은진지함. 이 농담에 진지함이 숨어있다는 것을 본 자에게 복이 있다. 이 농담 앞에 진지해지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이 농담을 통해 복음은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따라서 이 지점은 엄격한 복음이 부드러워지는 지점이다.
10. 참새가 교수가 된다는 것이 웃긴가? 참새가 그대의 선생이기를 바랄 수 있는가? 오늘은 참새가 그대의 교수지만, 내일은 결국 한 앗사리온에 팔려 구워져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웃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진지함을 이해했다면, 아무리 참새가 선생이더라도 선생의 현존은 모범 자체다.
11. 사람들은 참 이상한 질문을 한다. 왜 성경은 예수님이 우신 이야기는 있지만 웃었던 이야기가 없느냐는 것이다. 하나만 질문해보자. 이런 치명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웃으면서 “들에 백합화와 공중에 새를 봐봐”라고 말했을까? 아니, 주님은 농담 같은 진지함으로 말했을 것이다. 가랑이가 찢어지지 않도록.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깨지기 쉬운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12. 이 관대함은 아주 거룩하고 부드럽다. 오직 한 주인을 섬긴 예가 되기 위해 그의 생명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사람, 그가 이 치명적인 상황에서 말한다.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아니, 저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를 봐봐.”
이 농담 속에 진지함이 느껴지는가? 이 농담 속에 주님의 슬픔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더 이상 왜 주님은 웃지 않는지 질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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