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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기의 작품

여행하는 심미주의자의 활동

by 엉클창 2020. 3. 5.
  • The Activity of a Traveling Esthetician and How He Still Happened to Pay for the Dinner
  • En omreisende Æsthetikers Virksomhed, og hvorledes han dog kom til at betale Gjæstebudet
  • Frater Taciturnus
  • December 27, 1845
  • KW13, SKS13, SV13, Fædrelandet 2078

세 번째 시기: 코르사르 사건(1845-46년)

여행하는 심미주의자의 활동The Activity of a Traveling Esthetician

 

배경

키르케고르는 평생 동안 3 번의 학문적인 싸움literary battles을 벌였다. 첫 번째는 20 대 초반 인 Orla Lehmann과 Johannes Hage와의 만남이었다. 마지막 싸움은 소위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공격으로,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이 두 번째 전투는 코르사르 사건Corsair Affair이며 덴마크 역사상 가장 큰 학문적 싸움이었다.

1845년 12월 22일, P. L. Möller는 그의 게아Gæa, 1846년 미학 연감에 <인생길의 여러 단계 Stages On Life's Way>에 대한 엉성한 비판을 실었다. 그 기사는 그 작품을 멋대로 칭찬했지만, 키르케고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키르케고르는 두 가지 이유로 뮬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키르케고르는 그의 <인생길의 여러 단계>를 방어하고 싶었다.

P. L. Möller

또한 기회주의자로 간주되는 한 남자를 불신하고 싶어했다. 뮬러의 기회주의는 양면 동전이었다. 그는 <코르사르>에서 몰래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대학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12월 27일 ><조국Fædrelandet>은 일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의심하고 있는 것을 폭로한 것이었다.

코르사르는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주간 풍자 신문으로, 추잡스런 스캔들을 폭로하는  잡지라고 조롱을 받기도 했다. 놀랄 것도 없이, 이 잡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은밀히 읽혔다. 편집자는 메이어 아론 골드슈미트Meïr Aaron Goldschmidt(1819-1887)로, 키르케고르의 몇 년 후배였으며 그는 키르케고르의 예리하고 변증법적인 재치를 흠모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뮬러를 불신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를 원했다. 그는 골드슈미트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골드슈미트가 코르사르와 거리를 두기 원했다. 그도 역시 그만두고 싶어했다.

Meïr Aaron Goldschmidt

 

키르케고르의 글이 뮬러의 경력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가져온 반면, 그는 대학에서 희망하는 자리를 결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키르케고르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귀결되었다. 비록 키르케고르 자신이 문자 그대로 이 기간 동안 그의 두 글에 이 공격에 초대했지만, 공격은 그가 상상했던 것을 넘어섰다. 코르사르는 그의 외모, 목소리, 버릇을 놀리며 캐리커처와 함께 그에 대한 답례로 그를 풍자하기 시작했다.

Kierkegaard and P. L. Møller

이러한 사건 이전에 키르케고르는 이 잡지에서 단 한 번도 좋지 않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사실, 코르사르는 그의 가명의 저자, 빅토르 에레미타Victor Eremita와 힐라리우스 북바인더Hilarius Bookbinder를 칭찬했었다. 그러나, 코사르는 사실 몇 년 후에 골드슈미트가 떠나면서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리고 그 잡지는 몇 년 더 계속되기는 했지만, 다시는 예전 같지 않았다.

키르케고르 캐리커처
키르케고르 캐리커처

키르케고르는 그의 공격에서 모두 두 개의 기사를 썼다.  그의 공격자들은 수개월에 걸쳐 몇몇 기사를 쏟아내며 공격을 계속했다.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적인 재치와 뛰어난 지성은 그의 작품에서 뚜렷이 드러난 반면 그를 조롱하는 기사는 명백히 어리석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심오했다. 하루 종일 거리를 거닐던 이 매우 대중적인 사람은 저녁과 밤에 탐욕스럽게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이 조롱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그의 가명의 저자 빅토르 에레미타의 책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외침으로 그를 조롱하곤 했다.

문 밖에 있는 키르케고르

 

<마음의 청결은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는 것이다>에서 나온 다음의 인용은 키르케고르가 코르사르 사건에서 조롱당한 때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이 부분은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Upbuilding Discourses in Various Spirits>를 참고하라.) 

아, 이 불행한 사람이여, 이 무겁고도 죄 없는 고난과 더불어 거만한 자, 분주한 자, 어리석은 자의 가혹한 심판을 견뎌야 한다. 그들은 그를 괴롭히고 상처를 주지만 그를 이해할 수 없다.1)

다음에 나오는 일기를 참고해 보라. 1846년 9월인데, 키르케고르가 전체 사건에 대해 사색하고 난 후에 쓴 글이다. 

내가 가명의 작품을 쓰면서 길거리와 차도에서 그렇게 많이 산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옳았다. 아이러니란 거리나 시장을 지키면서도 작가로서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는 데에 있다. 아이러니는 여기 고향에서 지적으로 영향을 받은 헤겔적 세력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분의 일, 즉 문학적인 훌리건들의 시도, 내가 정말 거리에 속한 자처럼 보이려는 시도가 있는 순간, 그 아이러니는 당연히 사라지고 그래서 나는 작별을 고한다. 
골드슈미트 자신이 이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나를 조롱했더라면, 그는 대단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직접 도전해야 했고, 내가 일을 끝냈을 때만 그렇게 했다. 만약 P. L. 뮬러의 기사가 한 달 일찍 나타났다면 그는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여전히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생산적인 한, 그런 방해에 노출되도록 위험을 무릅쓸 수도  없었다. 이런 방해는 다 쓸데없는 말로부터 생겨난 것들이다.2)

어떤 사람들은 키르케고르는 1846년에 저술을 중단하려고 한 이유가 코르사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 라는 결론을 짓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모순이 있다.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는 그의 저술을 끝내는 작품으로, 이것은 코르사르 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기에서 그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말했듯이, 나를 괴롭히는 유일한 것은 누구나 내가 작가가 되기를 그만두는 것을 최근의 이런 허튼 수작과 연결지어 생각한다는 점이다. 누구와도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어떤 세속적인 걱정에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그저 이 생각에 봉사하며, 나의 생각에 순종하여 일을 계속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끝이 시작과 같아야 한다는 것, 내가 그런 종류의 활동을 그만두고 포기하는 법을 알았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다. 나는 완전히 성공했다. 하지만 아마도 사람들이 이것을 정말로 이해했더라면 해로웠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착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자. 그냥 그들이 제멋대로 생각하게 하자.3)

이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몇몇의 저자 불명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시기부터 다른 소소한 기사들이 존재하나, 이 작품들은 키르케고르에 귀속된 것들이다. Barfod는 이 작품들이 키르케고르의 기록물Af Søren Kierkegaards Efterladte Papirer의 부록에 포함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1. "A Visit in Søro"라는 타이틀이 부여된 <게아>에 나온 뮬러의 기사
  2. "여행하는 심미주의자의 활동"이라는 기사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대답
  3. <조국>에 실린 뮬러의 대답 
  4. 골드슈미츠의 첫 번째 코르사르 기사
  5. 키르케고르의 두 번째와 최종 대답, "문학적 치안 활동의 변증법적 결과"
  6. 코르사르에 연재된 기사

 

기사The Article

키르케고르는 이 기사에서, 가명의 저자 Frater Taciturnus를 사용했다. 이는 뮬러가 혹평한 <인생길의 여러 단계>의 세 번째 부분의 "저자"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뮬러와 작가로서 코르사르와의 관계를 폭로했다. 이는 그의 생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 글의 제목은 뮬러가 하우치C. Hauch를 방문했다는 것을 언급한다. 그는 그 당시에  소로 아카데미Søro Academy의 선생이었다. 뮬러는 하우치가 키르케고르에 대한 자신이 견해에 동참했다는 인장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뮬러는 불공정했다. 왜냐하면 이런 인상을 준 후에, 그런 식으로 가정하고 키르케고르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사 이후에 독자들에게 이런 의혹스러운 사건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라고 격려했다!

키르케고르는 뮬러의 비판에 대답했다. "상상의 구성자"라는 용어는 <인생길의 여러 단계>에 등장하는 Frater Taciturnus의 일을 나타낸다. 그는 종교적 단계에 접근을 강조하기 위해 가설적인 상황을 구성한다.  

상상의 구성자, 그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all have doubted everything 시대에 살면서 대체로 기분이 좋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가 의심을 극복할overcome doubt 때, 반성reflection하고, 매개mediation를 찾고, 공포를 제거함으로 극복한 대로 종교를 남겨놓을 때, 그의 귀를 쫑끗 세우고, 틀림 없이 바람wind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p. 42)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언급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의미한다. "의심을 극복한다overcome doubt "는 구절은 헤겔의 사변 철학을 의미한다. 사변철학에서는 모든 것을 "체계system"에 흡수하려 한다. 헤겔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객관적으로 알려진다고 생각했으나 키르케고르는 특별히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가장 강력한 어조로 이런 입장을 반박했던 것이다. 

반성에 대한 언급은 다음 해로 돌아가서, <두 시대Two Ages>에 나오는 주제다. 키르케고르는 지난 세기와 달리 자신의 세기는 반성적이었을 뿐, 열정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반성이란 자기 참고적 지성 self-referential intellect이다. 반성은 주관성이 일어나는 열정적 관심이 없다."매개"는 모든 정립은 반정립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헤겔주의를 의미한다.반정립은 종합에서 매개되고, 종합은 그때 새로운 정립이 된다.그렇지만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모순의 법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믿음이 없으면, 누구도 객관적을 사물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매개는 무지의 틈 the chasm of ignorance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의심을 극복하고 종교를 잊어버리는 것은 객관화의 필연적 결과였다. 키르케고르는 이 기사에 자신의 간접적 글쓰기의 선언을 덧붙였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가명의 저자를 사용하였으므로 더욱 흥미롭다. 

그는 글쓰기 방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과제의 변증법적 난이도에 대한 인식을 가진 작가는 물론 극소수의 독자들을 예상한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가 그것을 서문에서 가식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로 그것을 인정하고 따라서 "나"라는 자기 자신을 사용한다 해도 그렇다. 이것은 정확히 안데르센이 아니라, 오히려 소크라테스적으로 그렇다. 이는 호기심을 채우며 사람들을 쫓아내버리기 위함이다. 그는 소수의 독자들에게 만족한다. 한 명이라도 만족한다. 더 적어도 만족한다. 그는 작가가 되는 데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의 모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신적 기쁨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변증법은, 특별히 이중 반성의 행태에서,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p. 44)

기사의 끝에 이르러 키르케고르는 코르사르에 도전하고 뮬러와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다.

내가 코르사르에 들어가면 좋으련만. 덴마크 문학에서 가난한 작가가 두각을 나타내기란 힘들다. (우리 가명의 작가를 가정하여) 그는 거기에서 학대를 당하지 않는 유일한 자다. 나의 상관인 힐라리우스 북바인더(<인생길의 여러 단계>의 편집자)는 내가 잘못 하는 것이 아니라면, 코르사르에서 우쭐해 한다. 빅토르 에레미타(<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편집자)는 코르사르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는 치욕까지 경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이 거기에 있었다. 정신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ubi spiritus, ibi ecclesia]  뮬러가 있는 곳에 코르사르가 있기 때문이다[ubi P. L. Møller, ibi The Corsair].(p. 46)

 

 

 

1)  Upbuidling Discourses in Various Spirits, 124.

2)  (VII I A 147)

3)  (VII I A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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