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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키르케고르의 루터에 대한 관점과 전통적인 인식 비교

by 엉클창 2021. 10. 18.

 

마인드맵 올립니다.
이 맵은 키르케고르의 [자기 시험을 위하여] 관련 다음 논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논문: Will the Real Martin Luther Please Stand up!
Kierkegaard's View of Luther versus the Evolving Perception of the Tradition.
Craig Hinkson

논문_루터 해석의 문제_이창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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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르케고르의 루터 해석

키르케고르는 루터는 문제가 없었으나, 루터교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루터에 대한 해석이 시다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루터는 행위를 제거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루터를 진리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마인드 맵의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행위를 강조한 키르케고르는 어떤 면에서 루터에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는가?
키르케고르의 시대와 루터 시대는 어떤 점이 달랐는가?

2. 300년이 지난 덴마크 루터교의 문제

루터가 종교개혁한 이후, 덴마크 교회는 복음이 변질되었다. 루터 시대에도 이 정도의 변질은 없었다. 루터 시대의 수도원 운동은 행위를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행위를 공로의 자만심으로 연결지으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루터의 신학을 받아들인 덴마크는 공로와 함께 행위까지 없애 버리고 말았다.

3. 루터 해석의 역사를 추적

키르케고르의 목적: 루터를 루터교에 다시 소개

각 시대마다 루터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다양한 루터의 이미지가 존재했고, 시대정신이 루터의 이미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스스로 판단하라]에서 이런 시대정신을 귀신, 악한 정신이라 비판하고 성령을 제시한다. 또한 이 논문을 쓴  Hinkson은 이런 루터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계몽주의와 후기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때, 키르케고르의 시대만큼 진짜 루터보다 더 멀리 있던 시대는 없었다! 루터를 왜곡시킨 인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멜란히톤

그는 루터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임에도 루터의 사상을 왜곡시켰다. 루터의 사상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루터가 가장 싫어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고, 스콜라주의였다. 그는 루터의 실존적 경험, 그의 인격을 포현했던  깊은 영적 시험을 제거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었던 루터를 제거하고 그의 가르침만 갖고 왔다. 따라서 진리의 주관성이 상실되었다. 

4. 경건주의

위와 같은 정통 루터교의 왜곡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 경건주의였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슈페너와 아놀드가 있다. 

● 슈페너(Spener, 1635-1705)

그는 루터 신학자였고, 경건주의 창시자,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었다. 국가교회의 형식주의를 비판했고, 국가교회는 또 다른 가톨릭의 교황체제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루터의 기본 교리로 "믿음에 의한 의"와 "양심의 자유"를 주장했으나 그 당시 국가교회가 이 기본 원리를 억압했다는 것이다.

●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

그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역사가였다. 루터파 신학에 실망하여 경건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공교회가 세상의 권력과 야합함으로 믿음의 본질을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이단들'로 정죄를 받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더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경건주의를 주장하며 철저한 개인적인 내면성과 영성을 추구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경건주의 전통르 물려받았다. 그의 사상은 아놀드의 사상과 닮은 데가 많이 있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경건주의가 남겨 놓은 영향력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괴테가 아놀드의 사상을 왜곡시켰다. 경건주의는 지나친 개인주의 때문에 계몽주의 시대가 오면서 계몽주의의 도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5.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그 당시 경건주의가 성숙해 가고 정통주의는 합리적 신학으로 변해갈 무렵 나타났다. 이 두 개의 반대되는 운동이 계몽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결국 계몽주의는 정통과 경건주의 운동의 혼합물이다.

또한, 이때 등장한 사상이 이신론이었다. 이신론은 합리적 신학이고, 자연 종교이며, 신의 자의적 개입을 부정한다. 자연의 합리적 법칙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신론은 계시나 기적을 부정하고 성서의 상징이나 비유적 해석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이신론이 나타날 때, 정통주의는 성서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은 설명을 더 강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기적, 예언과 같은 것들도 외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려 했다. 결국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맬란히톤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계시를 의지하지 않는 이성을 소중히 여겼고, 성서의 계시를 입증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했다.

● 레씽(1729-1781년)

그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나중에 극작가가 된다. 그가 볼펜뷔텔의 단편들(wolfenbüttel fragment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파장은 그 당시에 대단히 컸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를 실패한 묵지적 예언가라고 했으며, 새로운 믿음으로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해방자로 자신을 제시한 것이라고 썼다. 그는 또한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했고 미래에 다시 올 것이라고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대중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다양한 논쟁을 이끌어냈으나 레씽이 이러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현자 나탄"이라는 희극을 썼다. 이 책은 결국 19세기 역사적 예수에 대한 운동을 촉발시켰다. 

레씽의 사고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생각이었다. 그 이후 성서의 권위는 추락하였고 자유주의 운동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 그가 루터를 자유의 창시자요, 양심의 해방자로 존경했다. 그에게 루터와 예수는 자율적 이성의 최고의 권위자였다. 그는 루터를 가장 비정통적 운동의 창시자로 끌어들였다.

● 헤르더와 괴테

그들은 루터를 철저한 독일정신을 표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루터는 헤라클레스처럼 모든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하는 지적 횡포를 공격했다"고 말했다. 특별히 헤르더는 게몽주의 사상을 '민족정신'으로 발전시켰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모든 유기체에는 어떤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정신(영)이 역동적으로 자연 속에 있다. 이런 사상은 그 당시 낭만주의 사상을 발전시켰고, '감정'은 적절한 지식의 기관(organ)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의 발전은 생각하지 못했다. 

● 피히테와 헤겔

그들은 헤르더처럼 민족정신을 인정하였으나 헤르더에게 부족한 정신의 발전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들은 모든 역사적 사건은 정신의 발전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헤르더가 루터를 독일의 민족정신이라고 설명한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세계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으로, 자유의 전개 과정에서의 핵심적 단계다. 이 중에서 가장 투철하게 루터교인이었던 사람이 헤겔이었다. 그는 루터교의 유산을 집대성한 사람이었다. 

헤겔의 루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계몽주의의 자유의 개념을 그의 "주관성"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그는 루터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자라는 것을 인정했고, 주관성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실성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사람은 회개해야 하고, 그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 키르케고르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믿음에 대한 개념 이해가 다르다. 키르케고르에게 믿음은 진리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는(appropriation)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나에게(pro me)'가 의미하는 바와 일맥상통했다. 또한 그에게 믿음이란 질적 비약이다. 반면, 헤겔에게 믿음은 정신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다. 깨달음 혹은 인식이 있으면 정신의 운동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것은 양적 개념이고 어떤 티핑포인트가 존재한다. 이런 자기 지식은 자기 의식에서 정신의 자기실현의 한 부분이다.

둘째, 헤겔에게서 주관성이란 정신(Spirit)에의 참여와 같은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루터의 전통에 대해 재해석한 부분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실해진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정신(영)을 공유한다. 이때 절대정신의 외화 형태가 시대정신을 낳는다. 결국, 이것은 범신론의 한 형태다. 그에 따르면 오직 루터교인의 믿음만 이 비밀을 이해한다. 그는 "거룩한 정신을 듣는 주관적이고 활동적인 정신은 거룩한 정신 자체다. 정신과 스스로와 관계하는 이 관계, 이 들음이 믿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도원을 벗어나 결혼하고 시민의 삶을 살라는 루터의 명령을 정신의 삶에 완전한 참여로 이해했다. 따라서 루터가 수도원의 삶의 검약, 순종, 절제와 같은 삶을 폐지하고, 대신에 일과 상업, 결혼과 가족 등 일종의 사회 참여하며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극찬했다. 하지만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가장 반대하는 것이였다.

헤겔 철학은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보기에는 이것은 거대한 오해였다. 예를 들어, 루터를 독일의 민족정신의 구현으로 보는 것은 애국심으로 퇴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농민이 반란을 일으길 때, 루터가 세속 권위에 복종하는 경우, 그는 국가 권력을 존중하는 토대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런 권력에 저항했던 루터와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6. 하만과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학창시절에 하만을 읽었다. 하만은 루터의 작품을 열정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발견된 루터와는 전혀 다른 루터를 발견한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루터를 보고 흥분한다. 그는 "루터교의 설립자의 정신은 오랫동안 폐허 속에 파묻혀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이 예언자여! 당신은 옛 포도주를 맛보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이 강달당한 맛을 얼마나 부끄러워 했던가? 루터와 비교할 때, 재치 있는 프랑스 사상가인 몽테뉴와 심오한 영국의 사상가인 베이것은 다 무엇인가?

하만이야말로 계몽주의를 비판하고 루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가 아무리 스스로를 모든 종교적 횡포를 막는 루터의 표준이라 생각했어도, 그들을 숨겨진 로마의 가톨릭이라 비판했다. 우스꽝스럽게도, 가톨릭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은 그런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하만은 계몽주의를 새로운 스콜라주의, 새로운 교황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교황은 옛날의 교황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루터의 벽난로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지점은 정통과 계몽주의가 간과했던 것으로 루터가 타락한 이성에 적대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루터의 핵심 사상은 의지의 속박, 이성의 타락,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재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구분한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정립하려 한다. 이것은 이성의 교만으로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부른다. 이와 반대로,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하고, 고난과 십자가를 강조한다.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은 이성에게는 실족이었다. 

요약하자면, 루터, 하만, 키르케고르, 이 세 사람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타락을 이해했다. 초월적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의 이해 불가능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 이후, 칼바르트가 이 계보를 이었다. 그는 키르케고르와 루터를 거쳐 어거스틴과 사도 바울의 계보에 서 있다고 말했다. 

하만은 그 당시에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의 시대에 조명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가장 가까운 사이었던 헤르더에게도 그가 파악한 루터에 대한 어떤 것도 나누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광야의 설교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반드시 어느 때에든 자신의 계승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키르케고르가 그의 계승자였고, 그 또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다. 둘대 시대에 맞지 않는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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