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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유튜브

6강 키르케고르의 제자도(새와 백합의 모범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by 엉클창 2019. 12. 11.

사람은 근본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 마음부터 불안하다. 주식시장이 요동을 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금전적인 손실도 크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마음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마 주식 시장만큼 예측기법이 많이 발전한 곳도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은 어떨까? 인공지능 기술도 확률통계 기반으로 한 예측 기술 중에 하나이다. 4차 산업 혁명의 핵심 중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예측기술일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예측은 필요하다. 금전적 손실, 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알고리즘 등과 같은 것들이 이런 인공지능의 핵심 기술일 것이다.

조금 더 좁혀,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든가, 무당에게 찾아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도 역시 비슷한 심리다.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마음의 평안? 혹은 미래에 대한 더 효과적인 대처? 사실 이런 미래를 알고자 하는 행동들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 앞에서는 괴물 같은 지식일 뿐이다.

한 번 상상을 해보라예언기도를 받았는데앞으로 3년 후에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라리 어떻게 죽는지 모르다가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마 이런 예언을 듣지 못했다면 적어도 사는 동안은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하지만 주님은 어떤가?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자신의 운명을 아셨던 분이시다. 평범한 우리들이 앞으로 펼쳐질 불행한 미래를 이미 알았다면? 과연 우리는 괴로워서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저 들의 백합을 보라, 저 공중의 새를 생각하라.”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는 어떤 존재들인가? 우리가 평소에 그런 하찮은 존재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차를 타고 길을 지나가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존재들이다. 바쁜 일상으로 인해, 그런 존재들까지 신경 쓴다는 것은 아마 아무 일도 없는 백수나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말한다.

 

저 들의 백합을 보라. 오늘 활짝 꽃을 피웠지만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진다.”(6:25 이하 참조)

 

들의 백합은 내일 아궁이에 던져져 불에 타서 한 줌의 재로 없어질지라도, 오늘 활짝 꽃을 피운다. , 백합은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다. 내일 어떻게 죽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아무 관심도 없다.

새 역시 마찬가지다. 새와 백합은 오늘우리의 선생이다. 복음이 새와 백합을 우리의 모범으로 임명했다. 그런 새가, 오늘은 우리의 선생일지라도 내일은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려 죽어야 한다.(10: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는 천진난만하다. 새는 내일에 대한 염려가 없다.

바로 이런 새와 백합처럼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나면서부터 운명을 아셨다. 앞으로 삶에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 다 아셨음에도, 그분은 새와 백합처럼 사셨다. 그 길을 가볍게 가셨다는 의미이고, 그 고난의 길을 기쁘게 가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께 감사할 수가 없구나. 그분이 가신 이 탁월한 삶의 기술, 이 기술이 너무나 탁월한 나머지 우리 인간들은 그분이 가신 길에서 조금도 두렵고 떨었던 흔적조차 볼 수 없구나. 알았더라면, 우리 인간의 합리적 이성으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챘더라면 그분께 감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형수가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날,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단다. 하지만 사형수는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 죽음 앞에서 자장면을 먹든 짬뽕을 먹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죽음 앞에서 우리는 삶의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은 다르다. 그분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새와 백합처럼 사셨다. 새와 백합은 내일의 죽음에 대해 무지한 반면, 그분은 다 아셨음에도 새와 백합처럼 사셨다.

바로 이것이 새와 백합이 우리에게 모범인 이유다. 우리는 새와 백합처럼 살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내일의 염려 없이 살 수 있는가? 내일의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이방인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자들이다. 당신은 어떤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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