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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유튜브

7강 키르케고르의 제자도(새와 백합의 모범)

by 엉클창 2019. 12. 17.
  • 새와 백합의 모범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마6:28)


새와 백합은 복음이 임명한 우리의 모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우리의 모범이요, 우리의 선생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모범이요, 선생인가?

먼저 들의 백합을 생각해 보라. 백합은 바느질도 하지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재봉사도, 또한 가장 훌륭한 재봉사가 만든 옷을 입는 공주도, 모든 영광으로 옷을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솔로몬보다 더 아름다운 백합을 위해 실을 잣고 바느질한 사람이 있을까? 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실을 잣고 바느질을 한다. 인간은 옷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궁핍 혹은 결핍으로 인해 인간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을 잣고 바느질할 때 일을 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새와 백합을 통해 배우라. 


Pixabay로부터 입수된 Jill Wellington님의 이미지



  • 사람들의 오해

이 점에서 가끔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일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구원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는데,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먹이신다면, 새처럼 백합처럼 아무 일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몰상식한 이해로는 모범인 새와 백합을 통해 배울 것이 없다. 우리는 어떤 기쁨도 찾을 수 없고,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다. 


  • 경건한 이해

제대로 이해하자면 이런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이처럼 순수한 경건이다. 곧, 훌륭한 재봉사, 공주의 옷을 만들 만큼 훌륭한 디자이너가 세상에서 아름답고 멋진 옷을 만들 때만, 자신이 바느질을 할 때만, 자신이 한 땀 한 땀을 뜰 때만,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신다는 것을, 그분이 바느질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경건한 이해에 따르면, 그녀는 더욱 부지런해진다. 계속해서 바느질할 때, 계속해서 한 땀 한 땀을 뜰 때만, 더욱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 얼마나 은혜로운 농담인가! 모든 바늘땀마다 바느질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바느질 할 때마다 하나님이 바느질 하신다고 이해한다. 


이것은 얼마나 진지한가! 새와 백합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는 것이니까. 


인간이 낙심하고 절망할 때, 새를 보기보다 백합을 보는 게 더욱 수월하다. 낙심한 자는 눈을 치켜뜨기보다 내려뜨기가 쉬우니까. 그래서 하늘을 보기보다 땅을 보고 걸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이렇게 백합에게 배운 다음 공중의 새를 보라!


“그냥 나를 좀 내버려 두란 말이오!”


  • 하나님의 의도

아마 낙심한 자는 공중의 새를 보라 말할 때, 이렇게 저항할 수도 있다. 그래, 이해한다. 공중의 새를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부드럽게 가보자. 이것은 병든 마음에는 너무 도발적이고 격렬한 운동이니까. 

일단 땅 위에 있는 새에게 가보자. 오, 땅위에 있는 새가 방금 하늘로 올라간다. 자, 지금 올라간다. 이제 당신의 눈으로 저 새를 따라가 보라. 새가 올라간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머리를 들어보라. 지금이다! 딱 좋다. 새가 저 하늘 높이 있다. 

하늘에 있는 새를 보라. 당신은 저 둥근 하늘이 새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어 창공으로 날아가기 힘들게 하고 있다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다. 그러니 둥근 하늘이 새가 날 수 없게 압력을 가하고 억누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더욱 억압하는 분일 수 없음을 당신 자신에게 고백하라. 오히려 억누르는 것은 땅에 있고, 당신 자신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둥근 하늘이 새를 높이 올라가게 하듯이, 하나님도 당신을 높이 올라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 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



Pixabay로부터 입수된 Antonios Ntoumas님의 이미지


  • 건방진 흉내

인간이 공기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처럼, 새 역시 공기로 살 수 없다. 결과적으로 새들을 위해 심고 거두고 창고에 모아들이는 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위대한 공급자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섭리(providence)라 부른다. 

그분께서 심고 거두고 창고에 모아들인다. 온 세상은 그분의 위대한 창고와 같다. 건방진 자들이 하나님 없이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을 자신의 창고로 바꾸려 한다. 그런 사상을, 온 세상을 자신의 창고로 만드는 사상 만든다. 아마 자본주의는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흉내다. 여기에서 본받음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일 때, 정말 기분이 좋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새는 얼마나 즐거울까.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한다. 밭을 갈아야 하고, 씨를 뿌려야 하고, 수확해야 하고, 창고에 모아들여야 한다. 그때, 당신이 아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중의 새를 보라. 당신은 심고 거두는 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인간이 심고 거둘 때, 정말로 그것을 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라. 


“무슨 소리야! 내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들에 나가서 추수했다고, 땀이 쏟아져 내려 나를 흠뻑 적셨지. 추수했던 자가 바로 나야. 적어도 땀을 흘렸던 자가 바로 나였으니까. 실제로 땀을 흘리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추수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왜 나는 이런 식으로 땀을 흘려야 할까? 허튼수작부리지 말라고!”


“어이, 이봐, 인간의 이해여, 인간이 되기 위해 기절하는 법을 새를 통해 배우지 않겠나? 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경건한 높임을 새를 통해 배우지 않겠나?”


  • 일의 의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주실 때, 수고와 괴로움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쁨과 독립심을 주기 위해 일을 허락하셨다. 그것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댄서를 생각해보라. 댄서도 춤을 추며 땀을 흘린다. 그러나 춤추는 것이 일이고, 수고와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예가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한 경건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준다. 댄서는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불평할 리 없다. 


아기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아기는 거의 매일 유모차를 탄다. 하지만 성장하고 조금 있다 보면 걷기 시작하고 걷다보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유모차를 스스로 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장 아장 걷는 아가가 유모차를 혼자 밀 수 있는 힘은 없다. 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가가 유모차를 밀려 할 때, 아가 몰래 엄마는 유모차를 밀어준다. 




“여기 봐요. 이 작은 아가가 유모차를 밀고 있다고요!”


우리가 현실로 돌아와서 이 아이를 속상하게 하지 말자. 우리는 작은 아가가 유모차를 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유모차를 밀고 있는 것은 아이의 엄마다. 유모차를 스스로 미는 놀이를 할 때, 그것은 엄마가 아기를 즐겁게, 기쁘게 해준 것이다. 그때 꼬마는 헉헉거린다. 게다가 땀까지 흘린다. 

땀까지 흘린다고? 맞다. 땀이 꼬마의 이마에 맺힌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아가는 유모차를 민다. 그때 아가의 얼굴은 어떤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을까? 혹은 아가의 얼굴이 행복하게 빛나고 있을까? 사람은 아가가 행복에 취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와, 여길 봐! 이 작은 꼬마가 혼자 유모차를 밀고 있어!”라고 말할 때, 아가는 더욱 행복에 취하게 된다. 여기에는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 있다. 아기가 혼자 유모차를 미는 것, 이것은 일하는 것과 동일하다. 바로 이것이 경건한 이해다. 이것은 순수한 즐거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생각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결정적 이해다. 결정적인 사상이다. 새와 백합은 일하지 않으므로 이와 같은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 일이 당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땀을 흘리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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