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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의 세계사적 타당성

by 엉클창 2023. 8. 21.

이 글은 키르케고르의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에 나오는 일부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아이러니의 세계사적 타당성,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Ironiens verdenshistoriske Gyldighed, Socrates' Ironi

앞서 말한 아이러니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 즉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uendelige absolute Negativitet)으로 되돌아간다면, 아이러니는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제안된다. 아이러니는 더 이상 이런 저런 특별한 현상, 특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존재 전체(hele Tilværelsen)가 아이러니한 주체에게 낯설어진다. 낯설어진 아이러니한 주체는 존재에 낯설어진다. 현실성이 아이러니한 주체에게 타당성을 잃었기 때문에, 그 자신도 어느 정도는 비현실적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성(Virkelighed)”이라는 단어는 주로 역사적 현실성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특정 시기와 특정 상황에서 주어진 현실성이다.

이 단어는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데아와 현실성의 관계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룰 때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이런 저런 현실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데아의 구체성, 즉 그것의 현실성에 대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 “현실성”이라는 단어 역시 역사적으로 실현된 이데아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후자의 현실성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현실성이 그 존재의 총합에서 영원하고 본질적인 일관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시간과 공간에 의해 분리 된 여러 세대에 따라 주어진 현실성이 다르다.

어떤 발전에서든 세계정신(Verdens-Aanden)이 항상 그 자체로 존재할지라도, 특정 시점의 세대와 같은 세대의 특정 시점에 주어진 개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성은 거부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 발전(Verdensudviklingen)은 기꺼이 따라가는 사람을 이끌고 가지만, 따라가지 않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휩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가 그 자체로 구체적인 한, 그것이 지속적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되는 것이 필요하다. 즉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대와 개인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모순이 나타나고 이를 통해 세계 발전이 나타난다. 특정 시점에 주어진 현실(actuality, Virkelighed)은 그 세대의 개인과 그 세대에 유효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 발전이 끝났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이 현실은 다른 현실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과 세대를 통해 그리고 개인에 의해 발생해야 한다. 가톨릭은 종교개혁 당시를 살았던 세대에게 주어진 현실이었지만, 동시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실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다른 현실과 충돌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세계사(Verdenshistorien)의 심오한 비극이 있다.

한 개인은 세계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권한이 없는 존재일 수 있다. 그가 후자라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고, 전자라면 그는 승리해야 한다. 즉,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승리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발전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일관성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더 진정한 현실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거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진화(Evolution)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실은 희생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여전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새로운 현실은 희생제물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새로운 요소가 실제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희생제물이 필요하다. 새로운 현실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그 자체로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지나간 것에 대한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모든 전환점에는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움직임(운동, Bevægelser)이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것이 대체되어야 한다.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한, 우리는 여기서 예언자적 개인을 만난다. 그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윤곽으로 먼 곳에서 새로운 것을 인식한다. 예언자적 개인은 미래를 소유하지 못한다. 단지 예감만 있을 뿐이다. 그는 미래를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길을 잃었다. 그러나 그에게 미래와의 관계는 평화롭다. 왜냐하면 주어진 현실과의 충돌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적 영웅이 나타난다. 그는 새로운 것을 위해 싸우고, 그에게 사라지는 것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의 임무는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유효하게 만들어 과거를 간접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낡은 것은 대체되어야 한다. 낡은 것은 모든 불완전함이 인식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이러니한 주체를 만난다.

아이러니 한 주체에게 주어진 현실은 그 타당성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모든 곳에서 그를 괴롭히는 불완전한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새로운 것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가 이데아(idea, Ideen)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는 심판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러니스트는 예언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다가올 무언가를 가리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이지만 그의 입장과 상황은 예언자와 반대이다. 예언자는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다가올 것을 본다. 예언자는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세대에서 길을 잃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비전에 대해 사로잡혀 있었기에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반면에 아이러니스트는 동시대 사람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그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다가올 것은 그에게 숨겨져 있고 그의 등 뒤에 있지만, 그가 적대적으로 반대하는 현실은 그가 파괴해야 할 현실이다. 그는 불타는 시선으로 여기에 집중한다.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보기1 사도행전 5: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게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라는 성경의 말씀은 그의 시대와의 관계에 적용된다. 아이러니스트는 또한 세상의 발전이 요구하는 희생제물이다.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스트가 항상 희생제물로 쓰러져야 것은 아니지만 세계정신(Verdensaandens)에 봉사하는 열정이 그를 삼킨다.[#보기2 다음을 참고하라. 요한복음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또한, 시편 69:10을 참고.]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den uendelige absolute Negativitet)으로서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단지 부정만 하기 때문에 부정성이다. 그것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이런 저런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하는 것에 도움을 받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더 고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아무것도 확립하지 않는다. 확립되어야 할 것이 그 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는 티무르처럼 격노하며,[#보기3 티무르(1336~1405년)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이다. 그는 몽골의 정복자로, 그의 힘은 유럽의 볼가 강부터 중국의 만리장성까지 뻗쳤다. 그는 1398년 인도를 침략하여 방대한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승리의 행진 중에 잘린 머리로 탑을 쌓았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는 거룩한 광기(guddommeligt Vanvid)다.[#보기4 마태복음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또한, 다음을 참고. 막 13:2, 눅 19:44, 21:6]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세계사의 모든 전환점에는 어느 정도는 이러한 형성이 있어야 한다. 세계사 전반에 걸쳐 이러한 형성을 추적하는 것에 역사적 관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 개혁에 가장 가까운 시기의 예로, 카르다누스(Cardanus), 캄파넬라(Campanella), 브루노(Bruno)를 간단히 인용하겠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조차도 어느 정도는 아이러니의 예(example)였다. 이 형성의 중요성은 지금까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하게도, 헤겔이 부정적인 것을 그렇게 단호하게 편파적으로 다룬 이후로 그랬다. 그러나 체계에서 부정적인 것은 역사적 현실의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역사적 현실에서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만, 체계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는 주관성의 규정(Subjectivitetens Bestemmelse)이다. 아이러니에서 주체는 부정적으로 자유롭다. 주체에게 내용을 부여해야 하는 현실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현실이 주체를 붙잡고 있는 속박(Bundethed)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부정적으로 자유롭고 그 자체로 보류된 상태(svævende)에 있다. 왜냐하면 그를 붙잡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유, 이런 보류(Svæven)가 아이러니스트에게 어떤 열정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는 말하자면 무한한 가능성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파괴된 모든 것에 대해 그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하다면, 그는 거대하게 축적된 가능성(Mulighedens uhyre Reservefond)에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열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의 열정에 먹이를 주고 자극할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힘에 새로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낡은 것을 파괴하는지 물을 수 있고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해야 한다. 그는 주어진 현실 자체에 의해 주어진 현실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원리가 가능성으로서 그의 안에 ϰατὰ δύναμιν(잠재적으로)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자체에 의해 현실을 파괴함으로써 그는 세계의 아이러니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헤겔은 그의 책 Geschichte der Philosophie(II, 62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Alle Dialectik läszt das gelten, was gelten solI, als ob es gelte, läszt die innere Zerstörung selbst sich daran entwickeln-allgemeine Ironie der Welt.(모든 변증법은 그것이 타당해야 할 것을 타당하다고 허용하고, 마치 그것이 타당한 것처럼, 그것으로부터 발전하도록 내적 파괴를 허용한다.―세계의 보편적 아이러니)”

 *반사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물처럼, 부정적인 것은 자신이 지지하는 것을 자신보다 높게 보여주고 싸우고 있는 것을 자신보다 아래로 보여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은 물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세계의 아이러니(Verdens-Ironien)가 정확하게 해석된다. 모든 개별적인 역사적 현실은 항상 이데아를 실현하는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이것은 특히 유대교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유대교는 과도기적인 순간(Gjennemgangs moment)으로서의 중요성이 특히 두드러진다. 율법이 계명을 선포한 후 “네가 이것에 순종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덧붙였을 때, 이미 세상에는 깊은 아이러니가 있었다. 인간이 율법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조건과 연결된 구원은 가설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가 스스로 멸망했다는 것은 기독교와의 역사적 관계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출현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지 않고 단순히 세계사의 전환점으로 간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도 아이러니한 형성을 놓칠 수 없다. 그것은 이제 침례(세례) 요한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앞으로 올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올 일도 알지 못했지만 유대교를 파괴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것에 의해 유대교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자체로 유대교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는 유대교가 줄 수 있는 의로움(정의)을 유대교에 요구했지만 유대교는 이것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유대교의 존재를 허용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멸망의 씨앗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서 그의 성격은 완전히 가려져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형태로 세상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으므로, 말하자면 그는 단지 그 손에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형성이 완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자신의 아이러니를 의식하고, 주어진 현실을 심판할 때 부정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고, 이 부정적인 자유를 즐겨야 한다.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관성이 발전된 단계에 있어야 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주관성이 자신을 주장할 때,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주어진 현실과 마주할 때, 주관성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타당성과 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이것을 느끼면서 주관성은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이 자신을 간직하고자 하는 상대성(relativity)에서 자신을 구한다. 이 아이러니가 이제 세계사에서 정당화되는 한, 아이러니한 주체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주관성의 해방은 이데아에 봉사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이 정당화된 아이러니의 천재성이다. 영혼을 구하려는 자는 영혼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은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정당화되었는지는 오직 역사만이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가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본다고 해서, 현실에 대한 그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아이러니하게 행동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아이러니와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한 관점에 대한 충분히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런 관점이 거의 아이러니한 형태를 띠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날수록 현실의 파멸은 더 확실하고 불가피하며, 아이러니 한 주체는 그가 파괴하고자 하는 현실에 대해 더 우위를 점하고 더 자유로워진다. 여기서 그는 이제 세계의 아이러니와 동일한 작업을 조용히 수행한다. 그는 기성의 것을 허용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한편,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이 가면 아래에서 그것을 확실한 파멸로 이끈다. 아이러니한 주체가 세계사에 의해 정당화되는 한, 여기에 천재성과 예술적 정신(kunstneriske Besindighed)의 통일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주관성의 규정(Subjectivitetens Bestemmelse)이라면, 아이러니는 세계 역사에서 주관성이 처음 등장한 순간에도 나타나야 한다. 즉, 아이러니는 최초이자 가장 추상적인 주관성의 규정이다. 이것은 주관성이 처음 등장한 역사적 전환점을 가리키며,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도달했다.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가 어땠는지는 이 연구의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주어진 현실 전체가 그에게 타당성을 잃었다. 실체의 현실(Substantialitetens Virkelighed) 전체가 그에게 낯설어졌다. 이것이 아이러니의 한 측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는 그리스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아이러니를 사용했다. 그것에 대한 그의 행동은 항상 아이러니했다. 그는 무지하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깨달음을 구했다. 그런데도 기존의 것을 그대로 두면서, 그것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 전술을 최대한 유지했으며, 특히 그가 고발당했을 때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봉사에 대한 열정이 그를 삼켰고, 결국 아이러니가 그를 압도했다. 그는 아이러니로 인해 어지럽게 되었고, 모든 것은 현실(reality)을 잃고 말았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러한 관점과 세계 역사에서 그의 위치의 중요성에 대한 관점은 그 자체로 균형이 잘 잡혀 있으므로 일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헤겔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아이러니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그의 저술에서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반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진행하기 전에 나는 아이러니 개념에 대한 헤겔의 전체 이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약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헤겔은 항상 아이러니에 대해 동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논의한다. 그의 눈에 아이러니는 혐오(anathema)이다. 헤겔의 등장과 동시에 슐레겔의 가장 찬란한 시기가 도래한다. 그러나 슐레겔의 아이러니가 미학에서 만연한 감상주의를 심판한 것처럼, 헤겔은 아이러니 속에 있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했다. 전반적으로 멸망으로 향하는 사변의 탕자(prodigal son of speculation)를 막았거나 적어도 막고 싶어 했다는 것은 헤겔의 큰 공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가 항상 가장 온화한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들에게 외쳤을 때, 그의 목소리가 항상 부드럽고 아버지 같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혹하고 학교 선생님 같았다.

아이러니의 추종자들(Ironiens Tilhængere)은 그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는 곧 그들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이제는 그들을 돌이킬 수 없고 완고한 죄인으로 취급했다. 그는 이 아이러니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때마다, 언제나 가장 무시하는 태도로 대했다. 실제로 헤겔은 자신이 종종 “우월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엄청난 경멸과 우월감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헤겔이 그와 가장 가까운 아이러니의 형태에 의존했던 상황은 자연스럽게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를 손상시켰다.

종종 설명이 부족하다. 하지만 슐레겔은 항상 질책을 받는다. 이것은 헤겔이 슐레겔 추종자들(the Schlegels)에게 옳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슐레겔의 아이러니가 모호한 잘못된 길 위에 있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헤겔이 어떤 고립에 맞서 싸우는 진지함을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즉, 많은 격려(Styrkelse)와 건덕(Opbyggelse)으로 그가 저술했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던 진지함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피히테 이후의 아이러니에 다시 한 번 반대함으로써 아이러니의 진실을 간과하고 모든 아이러니를 그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아이러니를 불의하게 만들었다고 말해야 한다. 헤겔이 아이러니라는 단어를 언급하자마자 그는 즉시 슐레겔과 티크를 떠올리고, 그의 스타일은 즉시 어떤 분노로 특징지어진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선한 봉사뿐 아니라 슐레겔의 아이러니에 무엇이 잘못되고 정당하지 못했는지 적절한 곳에서 논의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의 관점으로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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