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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시기의 작품

두 편의 윤리-종교적 소론 소개

by 엉클창 2020. 3. 27.
  • Two Minor Ethical-Religious Essays
  • Tvende ethisk-religieuse Smaa-Afhandlinger
  • 저자: H. H.
  • 1847, published 1849
  • KW18, SKS11, SV11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8-51년)

두 편의 윤리-종교적 소론Two Minor Ethical-Religious Essays

원래 키르케고르는 <윤리-종교적 소론의 순환>(이는 또한 <아들러와 권위와 계시에 관한 책>으로도 알려짐)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썼다. 그 중 일부는 '천재와 사도와의 차이'로 따로 출판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사람은 진리를 위해 처형당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또 다른 에세이를 추가하고, 두 가지 모두 "두 편의 윤리-종교적 소론"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의 저자는 가명의 저자 H.H이다. 키르케고르가 결정적으로 종교적인 작품을 위해 사용하는 두 개의 "상위" 가명 중 하나다. 이 가명으로 출판된 유일한 작품이 이 작품이다. H. H.는 안티 클라이마쿠스(Anti-Climacus)와 같은 수준의 지적 담론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상화된 기독교의 대표성도 없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권위의 고동을 울린다.(키르케고르의 가명의 저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키에르케고르의 저술 방법을 참고하라.)

 

1. 사람은 진리를 위해 처형당할 권리가 있는가?Has a Man the Right to Let Himself Be Put to Death for the Truth?

"사람은 진리를 위해 처형당할 권리가 있는가?"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순교의 사상과 실천을 다룬다. 이 테마의 밑바탕에는 키르케고르 자신의 약혼자 레기네 올센을 버린 자신의 모습과 어릴적 아버지가 심어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나 어린 시절의 그리스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순교자가 진리를 위해 처형당할 권리가 있는지 궁금해 한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수준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 <두려움과 떨림>을 상기시킬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로 키르케고르와 레기네 올센에 관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결론에 이르기를, "인간(하나님과 달리)은 진리를 위해 처형당할 권리가 없다...[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처형을 당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은 처형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니까." 키르케고르는 처형(혹은 순교)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집행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때, 목사는 진리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한 영광스러운 사람들에 대해 설교한다. 목사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이 무언가를 도전하는 사람이 없다고 가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가 영적인 충고자로 청중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통해 이를 설득하려고 할 때, 더욱 날카롭게 설교한다. 적절하게 열변을 토하고 땀을 닦는다.
다음 날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결심한 사람 중에 하나가 목사의 사택에 찾아온다. 그는 말이 없었고, 조용하고 겸손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목사의 설교에 완전히 심취했던 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삶을 진리를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목사는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원,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습니까? 여행을 좀 다녀오시지요. 조금 기분전환을 하시고, 힘든 일은 좀 잊어버리세요.”(본문 중에)

 키르케고르는 나중에 <무장된 중립성>에서 이런 입장을 뒤집는다. 그는 순교는 과시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과 복음의 진리 사이에 분쟁을 야기하는 피할 수 없는 사건도 일어난다. 

 

2. 천재와 사도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a Genius and an Apostle

천재와 사도의 차이 원본

키르케고르는 영감과 목사의 천직vocation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권위authority의 주제에 해해 매료되어 있었다. 헤겔주의자인 아돌프 피터 아들러(1812-1869)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자리에서 물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천재적 작품이라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철회했다. 키르케고르는 아들러가 천재성과 영감의 범주를 혼동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에서 키르케고르는 절대적인 것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인 사도와 천재 사에에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자이고, 그렇게 권위를 부여받는 자라면, 그는 사도 바울을 천재라 말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천재라 여기고 "권위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직접"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훈련>과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명의 저자를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어떤 권위도 없다고 여겼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잘못된 주석과 사변적 사상이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 한 것은 무엇일까? 혹은 그들은 어떤 수단으로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을 혼란에 빠트렸을까? 아주 짧게, 단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역설적-종교적 영역을 심미적인 영역으로 이동시켜버렸다.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이룩했다. 모든 기독교적인 용어는 그 영역에 남음으로 질적인 범주인 바, 지금은 축소된 상태에서 온갖 종류의 것들을 의미하는 멋진 표현으로 봉사할 수 있다.
역설적-종교적 영역이 제거되거나 심미적인 것으로 회귀되어 설명될 때, 사도는 천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때 기독교와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 탁월성(Brilliance, Aandrghed)과 정신(spirit, Aand, 영), 계시와 독창성,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천재성, 사도와 천재, 이 모든 것은 동일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키르케고르가 "역설"을 언급할 때 그는 기독교의 신비를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주장에 지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경험적인 조사에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믿음에 의해 전용되어야 한다. 미학자는 기적적인 것 없이 복음서에 관련되기를 원한다. 그는 신약성서 저자들의 신성한 영감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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