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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시기의 작품

들의 백합, 공중의 새 소개(업데이트 중...)

by 엉클창 2020. 3. 28.
  • The Lily of the Field, The Bird of the Air: Three Devotional Discourses
  • Lilien paa Marken og Fuglen under Himlen: Tre gudelige Taler
  • 1849
  • KW18, SKS11, SV11

다섯 번째 시기: 직접 전달(1846-51년)

들의 백합, 공중의 새The Lily Of The Field, The Bird Of The Air

키르케고르의 대부분 직접적인 종교적 저술은 "강화discourses"라 불린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키르케고르의 종교적 강화에 대한 개요는 <18편의 건덕적 강화Eighteen Upbuilding Discourses>를 참고하라.) 이 강화들은 건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없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에서 서술한 것처럼(이 부분은 <두 개의 윤리-종교적 소론>을 참고하라), 사도는 절대자와 관계가 있는 반면, 그는 천재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시 태그 "권위"를 참고하라.
키르케고르의 가명 저자를 통한 독특한 공격 계획은 '뒤에서 상처를 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의 '경건한 기만(godly deception)'의 일부였다. 그의 철학적인 작품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의 건덕적 강화는 가명적인 작품들과 함께 동반된 것으로, 직접적이고 종교적이어서 이 작품들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종종 철학적 작품들에 비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에게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키르케고르의 저술 방법을 참고하라. 

<들의 백합, 공중의 새>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제2판과 같은 날 출간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작품만을 집필하고 있을 때 심미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이 종교적인 작품들을 출판하여 그것들과 동반된 작품을 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인생 길의 여러 단계>에 동반된 <상상한 때에 관한 세편의 강화>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세 편의 강화처럼, 이 세 편의 강화는 키르케고르의 삶의 세 단계 즉 존재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첫 번째 강화는 부분적으로 전달으로서의 침묵에 관한 것이며, 특히 새와 백합이 어떻게 말하고 이해하는가에 관한 것이며, 시인이 말하는 방식과 이해되는 것과는 반대로 이해된다. 그 시인은 당연히 미적 단계를 대표할 것이다. 두 번째 강화는 윤리적 단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순종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 강화는 기쁨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초월적 특성, 즉 어쩌면 더 나은 표현으로 초월적 경험이며, 따라서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된다. 

침묵Silence

세 편의 강화의 본문은 마태복음 6장이다. 첫 강화의 시작부터 키르케고르는 시인의 입장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종교적인 작가로써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가명의 철학적 저자가 시인의 저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복음은 나를 죽인다."(p.8) 

시인은 복음의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시인은 복음의 이해와 함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의 삶의 진정한 바탕은 그가 소원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절망이다. 이 소원을 탄생시킨 것이 절망이고, 또한 절망이 소원을 키운다. 그러나 “이 소원”은 위로 없는(comfortless) 발명이다. 확실히, 소원은 순간에는 위로를 준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해 관찰해 보면, 그 소원에는 위로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원은 위로 없음(comfortlessness)이 발명한 위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모순인가! 그래, 시인 또한 이런 자기모순인 것이다. 시인은 아버지가 기쁨의 아이라고 불렀을지라도 고통의 아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소원을 탄생시킨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이 소원, 이 불타는 소원은 포도주가 위로하는 것보다 훨씬 더욱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이 소원은 봄에 처음 나오는 새싹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이 소원은 낮 동안의 일에 지친 사람이 밤의 쉼을 간절히 바라며, 기쁘게 인사하고 있는 첫 저녁별보다도, 저 새벽에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사람이 인사하고 있는 마지막 새벽별보다도, 더욱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키르케고르는 새와 백합에 대한 어떤 시를 쓰는 것도 무시한다. 그들의 역할이란 인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함으로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침묵에서 우리는 경건함을 배우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성경을 성취하도록 초대받는다. 이 깨달음에서 개인은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키르케고르의 주요 범주 중 하나는 "대중"에 반대되는 개인의 범주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개인이다. 

진실로, 저 밖에 백합화와 새와 함께 있을 때, 당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이것은 이미 진지함이다. 당신은 그때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말할 때 완전히 망각되었던 무언가를 느낀다. 겨우 우리 둘이 함께 이야기 할 때도, 심지어 우리가 열 명 그 이상일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신과 나, 우리 둘, 혹은 우리 열 명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은 쉽게 망각된다. 그러나 선생인 백합화는 심오하다. 그녀는 결코 당신과 관계한 적이 없다. 그녀는 침묵한다. 그녀는 침묵함으로써 당신 앞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당신에게 표현하기 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당신은 또한 진지함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수 있다.(번역 초고, 17쪽)  

키르케고르는 다시 시인의 주제로 돌아간다. 

확실히 시적인 말은 일반적인 사람의 말과는 다르다. 시적인 말은 엄숙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의 말과 비교할 때, 거의 침묵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적인 말은 결코 침묵이 아니다. 시인은 침묵하기 위해 침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더 많은 말에 이르기 위해 침묵을 찾는다.
저 밖에 침묵 속에서, 시인은 그가 결코 행할 수 없는 위대한 행위를 꿈꾼다. 왜냐하면 시인은 확실히 영웅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웅변가가 된다. 아마도 그는 위대한 행위의 불행한 연인(unhappy lover)이었기 때문에 웅변가가 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영웅은 위대한 행위에 행복한 연인(happy lover)이다. 결과적으로 (진지함의) 결핍이 본질적으로 시인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 결핍이 시인을 웅변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가 웅변가가 된 것이다. 그의 웅변, 그것이 바로 그의 시(poem)다.
저 밖에 침묵 속에서, 시인은 온 세상을 변화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계획을 생각해 본다. 결코 실행 불가능한 위대한 계획 말이다. 그러나 아니, 그것들은 시가 된다.
저 밖에 침묵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백합화와 새가 그의 선생이 되는 대신에, 그는 모든 만물들을 메아리치는 큰 방으로써 자신에게 봉사하게 한다. 심지어 그의 선생인 백합화와 새도 그에게 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메아리는 그의 시이다. 왜냐하면 그냥 절규하는 것은 결코 시일 수 없지만, 시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의 메아리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와 백합화가 있는 침묵 속에서, 시인은 침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명확히 그가 그 관계를 역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며, 백합화와 새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인은 백합화와 새에게 말을 빌려준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게 하는 것을 그의 편에서는 심지어 장점으로 상상한다. 반면에 시인의 과업은 그가 스스로 백합화와 새에게서 침묵을 배우는 데에 있다.(번역 초고 18-9쪽)

순종Obedience

이 부분은 두 번째 강화에 해당된다. 키르케고르는 이 부분에서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복음의 본문을 사용한다. 키르케고르의 독자들이라면 이 부분은 몇 번이나 사용한 본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특별히 이 부분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책이 있다면 <스스로 판단하라!>이다. 이 책의 2장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부분을 참고하면 된다. 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나의 독자, 당신도 알다시피, 세상에는 종종 “이것이냐/저것이냐(either/or)”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것이냐/저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즉, 희망, 두려움, 바쁜 활동, 긴장된 무기력 같은 것들이다. 당신은 또한 동일한 세상에서 이것이냐/저것이냐는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이 지혜가 가장 중요한 이것이냐/저것이냐 만큼이나 큰 파장을 만들었다는 것도 당신은 안다. 그러나 저 밖에 백합화와 새가 함께 하고 있는 침묵 속에서, 거기에 이것이냐/저것이냐가 존재한다는 어떤 의심이 있는가? 혹은 이것이냐/저것이냐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어떤 의심이 있는가? 혹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것이냐가 유일하게 이것이냐/저것이냐 인지에 대한 어떤 의심이 있는가? 

그는 다시 개인 대 대중의 주제로 돌아간다.

하나님이든가. 이것을 복음이 설명한 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중히 여기든가, 그분을 경히 여기든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일하고 있을 때, 군중들 속에 있을 때, 누군가를 중히 여기고 그를 경히 여기는 것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숫자가 작아질수록,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수다스러운 사교적 사귐은 더 적어진다. 다시 말해, 내면적 사귐은 더욱 증가한다. 그 관계가 더욱 내면적일수록, 이것이냐/저것이냐는 관계를 위한 법칙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무조건적으로 비사교적이다. 두 연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관계 역시 비사교적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들의 관계에 이 법칙이 적용된다. 서로를 중히 여기든가, 서로를 경히 여기든가....
그때, 이것 이것이냐/저것이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것이냐/저것이냐는 어떤 요구(requirement)이다. 사랑하는 연인(lovers)은 한 사람이 다른 연인에게 말할 때, 사랑을 요구하듯이, 이것이냐/저것이냐는 요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인으로서 당신과 관계하지 않는다. 당신도 연인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관계이고,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것이냐/저것이냐로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나님은 순종을,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백합과 새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들은 흔들림 없이 정확히 창조된 대로 행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열되고 부패한 본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순종을 배울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백합과 새들은 모범으로 순종의 스승이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순종이고, 무조건 순종이다."(번역 초고, 26쪽) 

백합과 새의 순종은 그들의 파멸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에 완전성을 달성한다는 점에서 완전하다. 모든 자연은 성숙함이나 완벽성의 지점을 달성한다. 이 순간이 지나면 서서히 쇠퇴하는 시기가 시작된다. 백합과 새는 이 과정에 복종한다. 이 짧은 순간의 결실의 즐거움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미적인 쾌락이다. 인생은 우리의 기쁨처럼 짧다. 인생의 많은 즐거움은 기억(recollection) 속에 살아 있다: 이전의 사랑, 잃어버린 젊음 등등. 그러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백합과 새는 조물주의 설계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순종적이다. 우리 역시 이 설계에 굴복해야 하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백합화가 자신의 환경이 너무 불행하여, 그녀가 꽃을 피우는 같은 순간에 그대로 꺾여야 하는 것을 확실히 그녀가 예상할 수 있다 해도, 그래서 그녀가 세상에 온 것이 파멸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녀가 세상에 온 것이 마치 오직 죽기 위한 것처럼, 그녀가 죽기 위해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해도, 순종하는 백합화는 순종하면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꽃을 피운다.
당신이 그 순간에 그녀를 보았다면, 이렇게 그녀가 피는 것이 곧 그녀의 파멸이었다는 것을 결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풍부하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그녀는 그렇게 풍부하고 아름답게 계속 가다가,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 파멸에 이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했다.
우리 인간이, 혹은 사람이 백합화의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확실히 세상에 태어남과 파멸이 결국 하나였다는 생각에 절망하였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절망하여 한 순간만이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모습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것이다.
백합화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한다. 따라서 그녀는 아름답게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녀는 방해받지 않은 채, 그와 같은 순간이 그녀의 죽음이었다는 생각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방해받지 않은 채, 그녀는 실제로 그녀의 완전한 가능성이 되었다.
오, 만약 한 백합화와 다른 백합화에서 아름다움에 차이가 있었다면, 이 백합화가 상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니까. 즉, 같은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파멸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파멸이 확실한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진실로 자신의 파멸과 마주하고 선다는 것,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에 서기 위한 용기와 믿음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오직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번역 초고, 30쪽) 

심미적 관점에서,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과 과일의 무르익음은 순간적인 것이며, 아름다움의 절정을 따라 쇠락이 뒤따르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러나 불멸인 우리 같은 영적 존재에게, 죽음과 죽음에 대한 굴복은 일시적인 것이고 이런 굴복은 불멸로 대체되는 것이다.  

백합과 새들이 드러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순종은 단순함(simplicity) 그 자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단순함이 있는 곳에, 기만의 가능성은 없다.  

당신의 이 간구가 들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한다면, 그때 당신 안에는 어떤 애매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 안에 어떤 애매한 것도 없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단순함(simplicity)으로 존재하게 된다. 사탄의 모든 교활함과 시험(temptation)의 덫이 결코 공격할 수 없고 사로잡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단순함이다.
사탄이 날카롭게 그의 먹잇감으로 감시하고 있는 것(그러나 백합화와 새에게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 모든 시험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고 확실히 그의 먹잇감인 것(그러나 백합화와 새에게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은 애매함(ambiguity)이다.  

순종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리고 순종의 대상을 파악하려면 애매함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믿음의 교리는 거부되어야 한다. 키르케고르의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그는 모든 변증학을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거부했고, 실존적 믿음의 도약을 도약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변명으로 거부했다. 다시 말해, 이는 믿음의 대상을 확률로 만들어 버린다. 순종의 단순함은 신앙의 단순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때 복음은 무엇을 하는가? 양육의 문제에 지혜로운 복음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해 어떤 사상다툼이나 말다툼에 끼어들지 않는다. 복음은 상황에 맞는 해법이 사람이 먼저 복음이 말한 것을 깨닫고, 그 다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복음은 반대이다. 즉, 사람이 복음이 말한 것을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순종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안셀름(Anselm, 1033-1109년)의 신학에 동의한다. 그는 크레도 우트 인텔리감(Credo ut intelligam)을 말했다. 이 말은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물과 마주치면 먼저 물을 조사하여 과학의 정밀조사를 받게 하거나 물에 내려가 수영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인공물을 조사하는데 과학적인 방법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신앙을 제외하고는 다가갈 수 없다. 

기쁨Joy

세 번째 강화는 기쁨에 관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백합과 새의 순간성에 대한 주제를 다시 시작한다. 그들은 비록 존재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단순함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기뻐한다. 

모든 피조물은 멸망(perishability)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고 자신의 뜻에 반하여 멸망의 지배하래에 놓인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모든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하늘의 별이 아무리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가장 확고하게 고정된 별도, 별은 어느 날 그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고 떨어지게 된다. 결코 위치를 바꾸지 않는 별도 언젠가 심연으로 떨어질 때, 그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버림받고 멸망의 먹잇감이 될 때, 사람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이 모든 세계는 변하게 될 것이다.
백합화가 즉시 아궁이에 던져질 운명을 피한다 해도, 그녀는 이미 이런 저런 일들로 고통을 당한 후에 시들어야 한다. 새가 나이 들어 죽게 될 수는 있어도, 여전히 언젠가는 죽어야 하며, 이미 이런 저런 일들로 고통을 당한 후에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아, 모든 것은 죽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멸망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멸망, 멸망, 그것이 탄식(groan)인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의 지배 아래에 존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신음이 의미하는 바이다. 즉, 감금(confinement), 제한(restraint), 투옥(imprisonment)이다. 그리고 탄식의 내용은 멸망, 멸망이다!
그러나 백합화와 새는 무조건적으로 기뻐한다.(번역 초고, 45쪽)

이 기쁨은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얻어진다. 백합이 꽃이 핀 후 곧 시들 것을 안다 해도, 즐겁다. 왜냐하면 백합은 현재를 즐기기 때문이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혹은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로 현존(present)하여 자기 자신(oneself)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현존하여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 이 “오늘”이며, 이 “오늘 존재하는 것”이고, 진실로 “오늘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반이 흔들릴 때,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고 별들이 자리가 바뀌더라도 내버려 두라. 새가 죽고 백합화가 시들어도 내버려두라. 예배 가운데 있는 당신의 기쁨과 기쁨 중에 있는 당신은 바로 이 오늘에 만물의 종말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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