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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s and papers/VIII

VIII2 B

by 엉클창 2020.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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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1 A   -   VIII1 B -  VIII2 B -  VIII2 C


13:61-63

Magister Adler's collision with the universal is, therefore, that of a special individual who has a revelation. To want to deny altogether the possibility of this extraordinary experience happening to a man in our age too would certainly have very dubious implications. But if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neither is there any direct, uniform repetition — there are continually new modifications. Our age is the age of reflection and good sense. It would be all right to assume, then, that the person who in our age is thus called by God would be related to his age. He no doubt would have superior reflective powers as an instrument at his disposal. This, then, would be the apparent difference between the "called" person in our age and one in an older age (for the essential likeness is and remains the call) — namely, that the called person in our age would have as his instrument a serviceable capacity for reflection, before which I, a humble critic, bow seven times, and before his call by revelation seventy times. The called person in our age will not merely be the instrument (spontaneous) but will consciously take possession of his call in quite another sense than what always has been the case in a divine call — to make up his mind about and to understand himself in this extraordinary thing that has happened to him.

To what extent it is possible to comprehend a divine call within human reflection, a joint activity, is a problem which I, a poor menial critic, do not dare presume to answer. The answer would first of all involve the life of the extraordinary person, were such a one to appear. But I can, up to a certain point, dialectically work through the idea until reflection runs aground.

If, then, everything is on the level in this matter of a man being called by a revelation, and he has a superior capacity for reflection at his disposal, he would understand that the ethical accompaniment to this call and this possession of a revelation is an enormous responsibility in all directions, not merely inwardly (that he himself was sure that this extraordinary thing had happened to him and understood himself in it, this we assume), but outwardly in relation to the established order, because in reflection the extraordinary has the dialectic not only of being the supreme salvation but also of being potentially the worst corruption. His responsibility in reflection would then be that he not become the worst misfortune for the established order and that with fear and trembling he see to it, as far as he is able, that no one is harmed by a direct relationship to his extraordinariness. If we now let the serviceable reflection give counsel all by itself, then the final consequence would be that he completely destroys himself, humanly understood, completely destroys his own impression, makes himself as humble and insignificant as possible, almost detestable, because in reflection (where every qualification is indeed dialectical) he properly understands that the extraordinary, beyond the point where it is in truth and is the extraordinary, is and can occasion the most frightful corruption. In the uttermost consistency of reflection he would then transform the act of revelation itself into his life's deepest secret, which in deathly silence becomes the law of his existence, but which he never communicates directly. — But look precisely this would be to fail completely in his task, in fact, would be disobedience to God. For the person who is called by a revelation is specifically called to appeal to his revelation; he must, in fact, use authority by virtue of being called by a revelation. In a religious revival it is not up to the person who has been awakened in an extraordinary way to go out and preach this to people; on the contrary, it can be completely right and pleasing to God and obedience to God for this to remain the awakened person's secret with God. But if the person who is called by a revelation and to communicate a revelation wants to be silent about the fact of the revelation, then he offends God and reduces God's will to nothing. It is the very fact of the revelation which is decisive; it is this which gives him divine authority. It does not depend — as they teach in the confused philosophy of our age — upon the content of the doctrine, but the fact of revelation and the divine authority which follows from it are decisive. If I imagined a letter from heaven, then it is not the contents of the letter, no matter from whom it came, which is the main point. The main point is that it is a letter from heaven.....


113:5

. . . .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그시다는 것, 진실로 스스로를 고발하는 마음보다 더 크시다. [삭제된 것: 우리가 자기고발에서 극도의 우울을 경고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심을 저하시키려 하지 말자. -우리를 있는 모습보다 덜 죄책이 있는 자로,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하든가, 우리의 죄책에 더 사소한 이름을 부여하든가.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을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크심은 용서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심이 용서하는 중에 더욱 커지게 드러나기 위해, 우리가 미친 사람처럼 죄 짓지는 말자.] -Pap. VIII2 B 113:5 n.d., 1847-8


112

원고에서;

. . . 우리가 마치 그것은 과거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라고 말하는 결백한 죽음으로 고난당했던 영광스러운 자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그분의 죽음을 상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여기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그분의 사도들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은 아니다. 그분의 죽음은 과거가 아니다. 그때 이후로 18세기가 흘렀을지라도 그렇다. 그분의 죽음은 세계가 지속된 만큼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그분이 죽음을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분을 붙잡고 죽였던 사람들은 단지 몇 명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세대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인류였다. 우리가 사람이면서도, 단지 구경꾼이면서 그 사건의 관찰자였다면, 우리 역시 이 부류 중의 하나다. 시인이 요구했던 것, 강렬한 동정(Medlidenhed)은 우리에게 요구된 바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공범(Medskyldige)이다.

나의 청자, 당신은 확실히 이것을 반성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하듯, 여기 하나님의 집에서 설교자가 약간의 달변으로 당신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여백에서: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과 함께 깊은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당신이 그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켰을 때 당신이 스스로 공범자라 생각했다면, 이에 대한 인상을 얻기 위해 달변의 도움은 필요 없다. 특별히 그런 동시대인들과 비교하여 당신은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며 어떤 물타기(mitigation)’가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당신이 아무리 동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상상한다 해도, 그것은 의미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현실성(actuality)이 완전히 다른 방식에서 일깨우고 각성시키면서 더 잘 설교하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자보다. . .

그러나 당신이 이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기 전, 이 강화는 말해야 한다. 당신의 관심을 혼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음보다 더욱 적절한 것에 대해서.

그분께서 배신당한 밤에 대해서

그때 주변 분위기로 인해 산만해지지 말자. 건물의 아름다움, 웅장함, 예술 작품들 때문에 산만해지지 말자. [*] 이 속에 있는 불신적이고, 기만적이고, 현혹적 안전으로 인해 산만해지지 말자. 그것은 단지 당신 주변의 밤이 되게 하자.

그분께서 배신당한 밤에[**]. . . 이 밤이 전환점이다. 그러나 외적인 세계에서와 같이 않다. 외적인 세계에서는 태양이 잠시 저물다가 뜨는 것이 오래 걸리는 것만큼 지는 것 역시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분의 파멸은 두렵게 속도가 증가 한다. 이 밤이 분기점이다. 모든 것은 공포를 위해 준비된다. 그분께서 해야 할 모든 것은 만찬에서 일어서는 것이고, 그 밤에 나가는 것이다. 그때 이 밤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공포와 함께 잠시 동안 폭풍이 하늘을 어둡게 하는 반면, 이 밤은 한 순간에 정점에 이른다. 두려운 대격변(upheaval). 그럼에도 그것은 동일한, 동일한 사람들, 동일한 대제사장, 동일한 이웃이다. 그분 역시 동일하고, 불변한 자이다.

그분의 삶은 그들의 세속적인 삶의 정반대다. 세속적인 삶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의견을 공유할수록 명예, 존경, 능력, 영향력은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했다. 반면 그분은 언급된 순서와는 반대 순서로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했다. 그리하여 그분은 지금 조롱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모든 사람들(all ranks)을 통과한다. 그분이 진리이셨던 것만큼 진실하게, 진리는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고난당해야 한다. 처음에는 진리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점점 더 이 일이 진행될수록,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명확하고도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를 갖는다. 점점 더 사람들은 진리에서 돌아선다. 마침내 진리가 완전히 홀로 있을 때까지 말이다. 세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선은 탁월한 표지(signs of distinction)의해, 선을 찬양하며 참여하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식되는 반면, 진리는 역전된 반응에 의해 인식된다. 바로 이것이 진리의 탁월한 자국이다. 진리가 홀로 서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때 진리는 모욕당한다. 비웃음을 받고, 조롱받고 결국 십자가에 달린다. 진리는 아마도 교만한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세속적인 계급에서 저런 상승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믿는 자는 이 역전된 운동을 보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다.

[*] 여백에서: 이뿐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도 여기에서는 불신적인 안전이다.

[**] 여백에서: 주의

이 강화가 전달된다면, 전체 소개는 생략될 것이다. 이 강화는 바로 본문이 시작된다. 그분이 배단당한 밤에. 주변 환경이 당신을 산만하게 하지 말라. 이 둥근 천정의 견고함이,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예술품들이 당신을 산만하게 하지 말라. , 이뿐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산만해지지 말라. 여기에 신뢰할 수 없는 안전도 그렇다. 이것이 단지 당신 주변의 밤이 되게 하라. 그분께서 배신당한 밤에. 이 밤이 그분의 삶의 전환점이다. -Pap. VIII2 B 112 n.d., 1847-48.


116

The book is to be dedicated to Bishop Mynster.


118

To
His Excellency

Your Grace, Bishop Dr. Mynster
St. D., DM., a.o.
this small book
is dedicated
in deepest veneration.


166

N.B. It is best to remove the allusions to the dogma of inherited sin which are found especially in chapter two (and anywhere else they are found). It would take me too far out, or farther than is needed here or is useful. What is appropriately stated about sin — that orthodoxy teaches that there must be a revelation to show what sin is — is not said with respect to the doctrine of inherited sin.

N.B. 특히 제2장(그리고 그 밖의 어디에서나 발견되는)에서 발견되는 유전죄의 교리에 대한 암시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은 나를 너무 멀리 데려갈 수도 있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나 유용한 것보다 더 멀리 갈 수도 있다. 죄에 대해 적절하게 진술된 것을, 즉 정통성이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유전죄의 교리에 관해서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168:5

...if he were not properly composed originally of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he could not despair at all. Thus despair in man is a misrelation between the temporal and the eternal, of which his nature is composed — but from God's hand in the right relationship.

How does the misrelationship happen, then? From the man himself, who disturbs the relationship, which is precisely to despair. How is this possible? Quite simple. In the composite of the eternal and the temporal, man is a relationship, in this relationship itself and relating itself to itself. God made man a relationship; to be a human being is to be a relationship. But a relationship which, by the very fact that God, as it were, releases it from his hand, or the same moment God, as it were, releases it, is itself, relates itself to itself — this relationship can become in the same moment a misrelationship. To despair is the misrelationship taking place.


186

Invitation

The undersigned plans to give a little series of lectures on the organizing trend throughout my entire work as an author and its relation to the modern period illuminated by references to the past.

As auditors I have in mind particularly theological graduates or even more advanced students. It is assumed that the auditors will be well acquainted with the works, and others are requested not to consider this invitation. I would add that these lectures will in no sense be an enjoyment but rather hard work, and therefore I do not entice anyone. And this work will have times, in the understanding of the moment and of impatience, when it is plain boring, which in my opinion is inseparable from all deeper understanding, and therefore I warn everyone against participating. If I succeed in being understood, the auditor will have the benefit that his life will have been made considerably more difficult than ever, and for this reason I urge no one to accept this invitation.

As soon as ten have signed up, I will begin; the limit is twenty, inasmuch as I wish to have such a relation to the auditors that the lectures might be, if necessary, made colloquies.

The fee is five rix-dollars, registration with the undersigned.


188

Invitation

Gratified to learn that my upbuilding writings, addressed to the single individual, are still read by many individuals, I have considered obliging these my readers, and perhaps gaining more individuals as readers, by publishing such works in the future in smaller sections on a subscription basis. The possible advantages are, first, that the books will be read better if they are read in smaller sections, second, that a certain calmness of understanding may enter into the relation between author and reader, so that a beginning need not be made each time, and finally, that the publication can properly take place quietly and unnoticed, avoiding the attention of all those not concerned.

From July 1 of this year I plan, then . . . .

S. Kierkegaard
January,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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