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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온유리더십

03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by 엉클창 2020. 6. 18.

고대로부터 땅은 정복하고 정복당할 수밖에 없는 전쟁터였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땅의 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땅의 정복자로 예를 든다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는 여러 지역을 정복했고,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지은 70개의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그가 이룬 역사의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통일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문화를 융합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BC 323년 바빌론으로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열병을 앓다가 33세의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역사는 이런 정복하는 일과 정복당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이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땅이다. 땅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다.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몰락하고 만다. 성경은 이런 땅의 고통과 신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마4:16)

이 세상은 “그늘진 죽음의 땅”이 되었다. 이 그늘진 죽음의 땅에 한 줄기의 빛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원래 그가 땅에 주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땅의 주인이었던 그가 세상에 와서 무슨 일을 했는가 살펴보라. 지배와 피지배로 물든 이 땅에 와서 정복전쟁을 하였는가? 노예 해방 운동을 하기 위해 일생동안 헌신하였는가? 

희한하게도 땅의 주인인 그는 이 세상에서 한 마리에 어린 양처럼 끌려다니다가 결국 십자가에 죽고 만다. 그것도 33세의 나이에. 알렉산더 대왕도 33세에 죽었고 그도 같은 나이에 죽었다. 정복하는 일을 일생의 최대 과업으로 생각했던 한 왕은 역사 속에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현재 아무도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세력은 없다. 하지만 “온유와 겸손의 왕”이라 일컫는 그는 죽은 지 거의 이천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추종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있다. 바로 이것이 온유 리더십이다.

온유 리더십은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중요한 정신임에도 기독교 세계 안에서조차 잘 소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섬김의 리더십,” “서번트 리더십”이 더 많이 보급되고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불행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온유”나 “섬김” 역시 세상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할 주제다. 온유는 왠지 나약해 보이고, 섬김은 노예나 종이 하는 역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는 세상이 이미 약육강식이 되었고 지배와 피지배로 물든 죽음의 그늘진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주인이 되었을 때에는 이렇지 않았다. 늑대가 어린이와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녔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사11:6-8) 

하지만 죽음의 그늘진 땅에서는 땅은 언제나 정복자의 것이었다. 정복자는 땅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이런 일은 반복된다. 한 때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된다. 역사의 쳇바퀴는 철학자 헤겔이 말한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온유한 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헤겔이 본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었고,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정치제도만 보더라도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로 점철되었다가 발전되어온 형태라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역사는 절대 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절대 정신은 기독교의 성령이 아니다. 곧, 거룩한 정신은 아니다. 거룩한 정신은 “온유”다. 

온유는 한 마디로 역사의 쳇바퀴 안에 있는 정신이 아니다. 따라서 온유는 세상의 정신일 수 없다. 온유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온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 의식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이때 온유는 “잘 길들여진 멍에를 쓴 망아지”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게 길들여진 망아지다. 

비교해서 말해보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라는 사람이 있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쉽게 말해, 이 사람은 역사의 끝이 왔다는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끝나는 역사의 끝,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끝나는 역사의 끝이 왔다는 것이다. 곧, 민주주의는 역사의 끝과 같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주인도 노예도 없는 평등한 상태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지배와 피지배의 피 터지는 싸움이 종식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굴레는 여전히 역사의 쳇바퀴 속에서의 해석일 뿐이다. 

역사 밖의 운동, 계시의 운동으로서 오염된 땅의 회복의 운동이 있다. 그것은 절대 정신이 아니라, 성령의 운동이다. 곧, 거룩한 정신. 이 정신의 운동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온유다. 기독교의 온유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온유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나는 이 정신이 세상에서 수용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정신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민주주의가 나라의 주인을 국민으로 돌려놨다 한들, 올바른 결론이 아니다. 지배자가 땅의 주인이 아니고, “국민이 땅의 주인이다”라는 국민주권을 선언한다 해도 올바른 결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니까. 이 땅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줄기 빛이 되어 오신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한 마디 말로 결론 맺자. 이 그늘진 죽음의 땅을 정화시킬 유일한 사람은 온유한 자뿐이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이해할 때 누가 땅을 상속받겠는가? 저 땅은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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