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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온유리더십

04 땅의 정복은 계속된다

by 엉클창 2020. 6. 18.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지난 시간에 우리는 “땅의 정복”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더 전개시켜보자. 정복 전쟁은 과거 시대나 있었던 구시대적 유물이 아니다. 나는 우리 사회 역시 이런 지배와 피지배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더욱 깊숙하고 심오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정복 전쟁의 피 터지는 싸움은 저 적들과의 총칼을 들고 싸우는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에, 학교에, 직장에, 우리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현존한다. 마치 이것은 조금 더 온화한 형태인 것 같으나 더 사악한 형태일 수 있다. 합법적 경쟁과 비교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자본주의까지 결합해 버리면 웃지 못 할 참담한 일들이 벌어진다. 돈의 노예가 된 자본주의 신앙이 탄생한다. 

과거의 정복 전쟁은 눈에 보이는 “땅”을 획득하기 위한 총칼을 든 전쟁이라고 본다면,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자본 권력은 돈을 얼마나 더 획득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이다. 결국,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 주인과 종의 관계로 나뉜다. 땅은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배자는 왕에게서 돈을 갖고 있는 각각의 개인들로 바뀌고 돈을 갖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세상은 가르치기 원한다.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얻는 것이다. 돈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알라딘 램프와 같다. 램프의 요정은 주인이 소원을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듯이, 돈은 자신의 정복자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힘이 있다. 돈은 유동자산으로, 원하는 모든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 

나는 처음에 “분노사회”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분노사회는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의 실질적 지배자는 누구인가? 국민? 대통령? 국민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닌 것 같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 1조 1항의 내용이란다. 물론 국민이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도 뽑지만, 실질적인 힘은 “돈”이었다. 돈 있는 사람은 군대도 안 가고, 감옥도 안 간다. 돈 없는 서민들만 감옥 간다. 수천억을 사기친 대기업 총수는 감옥 안 가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몇 만원 훔친 가난한 자는 감옥 간다. 

분노 사회는 이런 상황에 대한 반발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반발하는 사람들도 돈을 원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돈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돈을 더 가져야만 하는 사람으로만 분류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돈의 노예가 된 상태다. 실질적으로 왕좌를 누리고 있는 것은 돈이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돈이다.
이런 싸움판에서 싸움을 해야 하는 기독교 정신이 온유다. 이런 점에서 온유는 “싸움의 기술”이다. 온유를 단지 사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기독교의 온유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싸움의 현장이다. 온유는 싸움의 현장에서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기술이다. 굉장히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간단히 온유가 싸우는 방법과 세상이 싸우는 방법을 정리해보자.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야기 하자면, 먼저 세상은 돈을 가진 “주인”과 거기에 종속된 “노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싸움 중에 주인은 노예로 전락하고 노예는 다시 주인이 된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정복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상은 정반합이 계속되는 변증법적 운동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온유는 돈을 원하지 않는다. 온유는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다. 따라서 온유는 저 싸움판에 끼어들어 같은 싸움을 하지 않는다. 온유는 돈의 획득을 통해 정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싸움의 목적이 다르다. 온유는 돈으로 오염된 이 세계를 정화하려는 것이다. 온유는 돈으로 오염된 이 세계를 다시 “선”이 통치하는 세계로 만들기 원하는 것이다. 그곳은 곳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온유가 가는 곳이면 언제나 지배와 피지배 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 자체에 해를 가한다. 다시 말해, 온유가 하는 싸움은 지배와 피지배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그런 구조, 그런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싸움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인홀드 니버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한 개인은 도덕적으로 산다. 하지만 사회나 공동체 전체는 비도덕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님비현상이다. 장례식장 같은 혐오시설이 필요하지만 내 앞마당에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라크에 선한 사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개인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서 거대 사회악을 싸워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달걀로 바위치기다. 그래서 미국은 니버의 이론을 통해 정당전쟁의 원리를 찾았던 것이다. 선한 개인이 거대 사회악과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미국과 같은 나라가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온유는 이런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 온유는 언제나 약하다. 온유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같은 싸움을 하는 것뿐이다. 온유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다만 적과 함께 하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위험하다. 이 싸움에서 목숨을 유지하며 승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온유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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