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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온유리더십

01 온유가 답이다!

by 엉클창 2019. 7. 18.

나는 우리 사회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은폐된 분노, 숨긴 분노를 품고 있는 분노 사회로 규정하고 싶다. 우울사회, 피로사회라고도 말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분노사회다. 4차 산업 혁명을 말하며 격변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가 떠안고 있는 인간 내면의 질병은 분노다. 이런 분노는 은폐되어 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표현하고 있은 언어나 말투 속에 내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말에는 이미 불평등에 대한 처절한 분노의 메시지가 숨겨 있다. 흙수저가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가 될 수 없다. 흙수저는 흙수저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평등과 기회 균등을 말하지만, 실제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계층간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차라리 조선시대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는 불평등한 신분제 사회다. 계층간의 이동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따라서 천민이 양반이 되는 일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불평등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더 높은 자리, 더 큰 성공을 꿈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 사회는 겉으로는 다 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민주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사회는 이미 구조화되어 있다. 계층간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흙수저와 금수저 이야기에는 이미 이런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해서 사고치는 범죄는 날로 증가한다. 묻지마 살인도 증가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숨겨진 분노와 비교한다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은 얌전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라

누가 하나 건들기만 해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들은 표현하지 않을 뿐, 누군가 그들의 분노를 자극시킬 대상을 찾고 있고 아마 그 분노를 아무도 모르는 상대에게 전가시키기 원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약간의 지적과 개입만으로도 큰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그때 우리가 주로 하는 말이 있다.

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어쨌든 분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 분노하는 자는 가능하면 멀리하는 게 좋다. 같이 싸우다가는 정말로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분노하는 일이 밖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가정 역시 분노사회다. 감정 조절이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현장은 사실 가정이 더 많다. 이런 점에서 이미 우리 가정은 썩고 있다. 제대로 분노를 다룰 만한 어떤 방책이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원수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런 점에서는 이미 감정 컨트롤이 불가능한 영역으로 내몰린다. 컴퓨터 게임방이다. 밖에서 협동심을 기르는 놀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을 일삼은 게임으로 위로를 얻는다. 이 세상에서는 사회적 약자고 언제나 권위와 권력의 압제의 대상이었으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제왕적인 권위를 누린다. 
기술의 발전은 날로 집약되고 강력해진다. 이렇게 기술은 더욱 강력해질수록 기술의 영향력도 커진다.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이 기술 문명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핀테크 등과 같은 용어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의 정신으로서, “온유를 소개한다. 
온유는 이런 분노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기술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기술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사람들이 로봇 기술에 찬사를 보내는 반면,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로봇 기술과 지능이 전쟁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온유는 단지 분노사회를 정화하는 기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술사회에 필요한 영적이며 정신적 건강이다. 기술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들에게 온유의 정신이 제거된다면, 기술은 인간을 역습하는 패악이 될 것이고 이 사회는 분노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온유를 이런 분노사회를 해결하는 정신으로 강조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도 온유를 강조한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유를 윤리적 덕목으로 강조하며 강조된 바는 없는 것으로 안다. 아마 이것은 온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온유는 한자로는 溫柔고 영어로는 meekness. 이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말로 온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온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는 온유한 사람은 사회에서 왠지 악한 사람들의 먹이가 될 것 같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녀를 교육할 때, “너는 밖에 나가 온유해야 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아마 한국적인 정서는 정반대로 가르칠 수도 있다. “넌 나가서 한 대 맞으면 두 대 이상은 때리고 와!”이거나 절대 당하고만 살지 말라!”는 충고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온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때문이다. 
온유는 한 마디로 말한다면,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다. 온유는 적극적은 싸움의 방식이다. 온유는 당하고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온유는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상대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성서에서 그 힌트를 얻고자 한다. 온유는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온유는 그리스도의 핵심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기독교 세계 안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분노사회의 해독제로서의 온유, 기술사회에서 기술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온유를 우리 시대의 가장 필요한 정신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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