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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온유리더십

02 온유란 무엇인가?

by 엉클창 2019. 7. 18.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하라고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큼 아마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영웅들을 떠올려보라. 전 세계에서 싸움을 가장 잘 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이 온유했는가? 혹은 성경에 나온 인물 중에서 여호수아, 기드온, 삼손, 다윗, 심지어는 바울에 이르기까지 온유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어떻게 온유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삶의 정신이 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예로 들었던 사람들은 온유했다기보다 더 강하고 패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이런 강함과 패기가 필요할 것처럼 보인다. 약한 사람보다는 강한 사람이, 겁쟁이보다는 대담한 사람이 이 시대에 걸맞다. 온유한 사람보다는 더 용기 있는 사람이 이 시대에 필요할 것 같다. 
이런 오해는 온유에 대한 개념의 어려움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차차 이런 개념도 살펴보겠지만, 일단 모세부터 짚고 가보자. 성경은 모세에 대해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한 마디로, 당대에 모세보다 온유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나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사전적인 의미로 모세의 온유함을 설명할 수 있는가?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무엇보다 살인자였다. 그는 이집트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을 본다. 그 후 좌우에 사람이 없음을 살펴보고 이집트 사람을 쳐서 죽인다.( 2:11-12) 한 마디로, 모세는 잔인했다. 
게다가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반항한다. 내 백성을 보내달라고 항의한다.(5:11) 이뿐인가? 그는 하나님과 싸운다.(5:22-23)

주여, 도대체 왜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습니까? 왜 나를 보냈습니까? 내가 파라오에게 말한 다음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합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금송아지 사건이었다.(32)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 백성들은 그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든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다. 그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그 백성이 마시게 한다.(32:19-20) 모세의 이런 성품을 보면, 전혀 온유함은 없어 보인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나와 르비딤에 이를 때였다. 아말렉 족속과의 다툼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가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 상상해보라. 모세가 말한다.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출17:9)

  
모세의 상황은 열악하다. 전쟁의 상황이었고 이집트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누구보다 온유한 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단순히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에서 온유를 설명할 수 없다. 
  

온유는 그리스어로는 프라우스라는 단어로, 성서에 많이 쓰이지 않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온유를 멍에와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온유란 잘 길들여진 멍에를 쓴 망아지. 온유는 무언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길들여진 것이다. 
농부를 상상해 보라. 농부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밭을 간다. 농부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밭을 가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그가 볼 수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밭을 간다. 이때, 멍에를 쓴 소는 잘 길들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온유란 잘 길들여진 멍에를 쓴 망아지라고 정의하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우리는 주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야 한다. 온유는 타고난 성품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온유는 대담함, 강인함, 용기와 같은 성품과 상충되는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온유는 더 대담하고, 강인하고, 용기보다 더 클 수 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셨다. 그때 스가랴 9 9절을 인용하며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이 구절에서 겸손하여라는 그리스어의 표현이 프라우스 곧 온유다. 그분은 온유의 왕이시다. 그분의 멍에를 메고 온유를 배운다면 잘 길들여진 망아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길들여진 망아지이며, 주님이 타신 저 나귀와 같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잘 길들여진 망아지인가? 멍에는 메었는가? 멍에를 메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나 분명한 것은 멍에를 멘 온유한 자가 없다면, 이 땅은 결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 이 땅은 온유한 자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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