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프로이트와 키르케고르
역자로서 <고난의 복음 제 4강화>에 대한 학문적인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sin)와 죄책(guilt)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를 졌지만 마음으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죄책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생각해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죄책”은 양심의 가책과도 다릅니다. 이 죄책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죄책," “기쁨”입니다. 키르케고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항상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기쁨”이라는 강화의 제목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죄책으로 고난당하나 여기에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니체와 프로이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니체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그는 「도덕 계보학」에서 “양심의 가책,” “형벌,” “채무의식”에 대해 다룹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그에 의하면 죄책과 관련해 어떤 괘락이 있다는 겁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그는 형벌의 역사적 맥락을 살핍니다. 형벌을 가하는 것은 옛날에는 거의 축제였다는 겁니다. 죄인을 잡아서 대중들이 모인 앞에서 온갖 고문도구를 만들어 끔찍하게 죽입니다. 하지만 어떨까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합니다.
형벌의 역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을 구분지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세뇌”를 시킨 겁니다. 그에 의하면, 양심의 가책도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고, 이것을 가장 잘 고도화시킨 종교가 기독교라는 겁니다. 따라서 죄책으로 고난을 당하는 기쁨? 니체가 보기에는 이런 감정은 “자기 학대의 기쁨,” “의지의 광기”입니다. 기독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천재적 재능을 소유했다고 말하지요.
프로이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기쁨? 아마 그는 이런 사람을 정신병자취급 했을 겁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적 메조키스트”입니다. 스스로를 처벌하기 위해서 불행한 상황을 일부러 만들고 거기에 안도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정신병자 아닙니까?
만약 니체와 프로이트의 분석이 맞다면, 키르케고르는 일종의 정신병적인 주장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그가 주장하는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기쁨”이 탁월한 경건의 능력인지 말씀드려야 합니다.
첫째, 니체와 프로이트와 달리 키르케고르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죄책은 니체의 “양심의 가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스스로를 학대하려는 프로이트의 메조키스트와도 다르기 때문에 이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의 죄책은 “사랑”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봅시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요? 엄마의 소원은 아이가 건강하고 차라리 엄마가 아팠으면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잘못을 범한다면 어떨까요?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엄마라면 차라리 아이가 옳고 엄마가 잘못을 범해서 형벌을 받기를 원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죄책은 이런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소원” 혹은 “바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걸 정신병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입시켜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죄책이 사람에게 있기를 바라는 “소원”이 생긴다는 겁니다. 위의 비유가 잘 맞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부분은 여기에서 일단락 짓겠습니다.
둘째, 개념의 전복입니다. 죄책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언가 결핍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죄책을 느낀다는 것을 완전함이라 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개념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부정적인 것, 결핍된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 앞에서 죄책으로 고난당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완전함입니다. 일단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넘어갑시다.
어째서 이것이 완전함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결백”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낳는가, “죄책”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낳는가? 키르케고르는 이 강화에서 결백은 오히려 이웃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켜준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웃에게 마땅히 져야 할 책임도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어떻습니까? 언제나 죄책으로 고난당합니다. 결국 이런 죄책이 이웃에 대한 책임을 낳는다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완전함이란 인간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하여는 간략하게 이렇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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