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는 운명적인 해였던 1848년에 출판되었다. 이 둘의 저자는 각각의 작품을 생산하는 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바쁜 해였다.
공산주의 동맹의 두 번째 회의가 런던에서 18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있었다. 이 회의에서 마르크스(여기에서 엥겔스는 빠짐)를 선언을 준비하는 자로 위임했다. 1848년 1월 26일 중앙 위원회는 마르크스에게 조금도 지체 없이 이를 끝낼 것을 요구했다. 아마도 같은 해 2월 1일 경에 원고가 런던에 도착했고, 공산당 선언의 초판이 2월 14일에서 18일 사이에 인쇄되었다.
2월 24일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이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필립의 브루주아 군주제를 전복시켰다. 파리의 이런 사건에 동력을 얻어, 언론의 자유, 배심재판, 독일 전 지역의 헌법 선언, 의회의 소집을 포함하여 자유주의적인 개혁에 대한 요구는 널리 퍼져갔다.
3월 초 자유주의를 표방한 정권이 독일에 들어섰고 3월 중순경 비엔나에서의 가두데모로 인해 오스트리아를 통치했고, 워털루 이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정치가였던 메테르니히가 물러났다. 그는 왕정복고의 중심인물이었다. 헝가리, 크로아티아, 베네치아 그리고 롬바르디아 등의 소요사태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더욱 약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반동적인 보루로 남아 있었다. 베를린에서 3월초 약 한 주 이상의 유혈사태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군대를 퇴각시켰고, 프러시아가 독일이 통일과 국가의 현대화를 이끌 것임을 알렸다. 파리에서, 그리고 공산주의 동맹의 수장인 마르크스와 중앙 위원회는 “공산당 선언”의 원칙을 독일의 상황에 맞게 수정했고,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 기준을 요구했다.
정치권력도 없고, 조직화된 군대의 지원도 없었고, 충분한 자금도 없는 데다, 언제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압력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연맹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갔다. 6월 그곳에서 그와 엥겔스는 신문사 Neue Rheinische Zeitung을 설립한다. 이 신문사는 1849년 5월 1일까지 지속된다. 그들은 이 신문을 통해 독일 정치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 비판(사회주의자가 아님)을 가한다.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군사적으로 위협했으나 재정적인 바탕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재집권을 하게 되었고 1849년 5월에 있었던 소요사태를 쉽게 진압했다. 마르크스는 쾰른에서 파리로 갔고 1849년 8월 6일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1883년에 죽을 때까지 살았다. 공산주의 혁명은 역사였다. (후에 “마르크스주의”가 일어났던 일은 다른 이야기이다.)
한편, 덴마크에서는 1848년에 덴마크식의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어떤 유혈사태도, 어떤 반동적 복수에 의한 파괴도 없었다. 도시의 교양 있는 엘리트층과 신흥 브루주아 계급은 헌법을 요구했고 왕은 이를 승인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 가지 요소가 절대 군주에서 현대적 자유주의 국가로 바뀌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 프랑스, 독일, 영국과 같은 더 산업화된 나라에서 발생했던 격렬한 투쟁에서 덴마크가 고립된 것과 덴마크의 석탄과 철의 부족은 덴마크의 느리고 더딘 발전에 기여했다. 둘째,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절대 군주는 이미 합리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관료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셋째, 바이킹 시대를 지나면서 생존했던 강한 지역 정부의 전통 가운데 정치적 경험이 풍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자원이 풍부했다. 새로운 조직(new constitution)이 통치했고, 땅이 없는 농민을 제외하고 모든 계급들의 고충을 알렸다. 하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에 대한 어려움은 프러시아와 전쟁을 했던 새로운 민주 정부와 관련이 있었다.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의 남쪽 일부 지역을 결국 이 전쟁에서 상실했다.
정치혁명은 비폭력적이었다. 혁명이나 통치 계급의 경제적 토대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 진화에 가까웠다. 혁명은 종교적이고 도덕적 유산에 대한 공격도 아니었고, 계급구조에 대한 공격도 아니었다. 땅이 없는 시골 소농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났을 때, 민주적이고, 입헌적이고, 관료제적인 구조는 이미 고충을 전달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에 유틀란트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 강화」를 집필했다. 프러시아의 군사적 도발이 있었고, 변화하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경제와 계급구조의 소용돌이, 새롭게 등장하는 현대적 민주주의가 있었다.
「기독교 강화」는 1848년 4월 26일에 출간되었는데, 키르케고르는 앞에서 언급했던 문제들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고 종교적 작가로서 그의 직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도시 계급들의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가정(assumption)들을 조사했다. 개념의 혼동, 불신앙(bad faith), 그리고 자기 정당화의 가식(falsetto)을 밝히려 했다.
그는 종교적 억측(presumption)을 거부했고, ‘문화는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이다’라는 주장의 말하지 않지만 이미 보편적인 변명(apologia)을 거부했다. 「기독교 강화」는 제공된 평화의 상징(olive branch)인 동시에 기독교 국가에 대한 심판이었다. 이 책이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무시되었을 때, 더욱 중요하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무시되었을 때, 「죽음에 이르는 병」과 「그리스도교의 훈련」이 그 뒤를 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1848년 3월에서 5월 사이여 쓰였고, 1849년 6월 30일에 출판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1848년에 시작하여 1850년 9월 17을 출판되었다. 둘 다 안티 클리마쿠스가 저자다. 이 두 작품 모두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종교적 가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1848년, 키르케고르는 또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한 편의 윤리 종교적 소론」,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 「무장된 중립성」, 「저자로서 나의 작품에 대한 관점」, 「“선장 스키피오와 같은 피스터”에서, 배우 요아킴 루드비그 피스터의 천재성에 대한 짧은 소고」
그야말로 다산의 해였다.
키르케고르는 절대 왕정에서 입헌 군주제로의 평화적 이행 과정에서 유익을 누렸다. 대다수 많은 사람들의 혼란에 비한다면, 자신의 직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인 삶에 참여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에게 호의적인 역사적 상황이 과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그의 결단을 도왔다.
그의 반응은 그 당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안목을 오늘날의 독자들도 놀랄 만한 대중의 참여의 부재를 혼합시켰다. 그의 저항은 그가 “권위 없이” 글을 썼다는 데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 문제가 종교적 문제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고, 그의 관계를 그 시대의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인 문제와 관련을 지은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키르케고르에게 1848년 결정적으로 많은 일을 했던 해였다. 여기에 굉장한 아이러니가 있다. 공산당선언과 기독교 강화가 반대편 방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거의 비교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의 유산을 물려받고, 그들의 투쟁에 대해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의 투쟁이 풀리지 않는 상태로 남았다. 이 두 사상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이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다.
키르케고르와 마르크스가 인간적인 성취와 같은 모든 동시대의 브루주아적인 삶에 부여된 정당성(justification)을 거부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한 사람은 초월 없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성취하기 위한 혁명을 꿈꿨고, 다른 하나는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무조건적인 것의 권위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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