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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믿음의 도약(1)

by 엉클창 2020. 7. 14.

데리다, 키르케고르, 헤겔

키르케고르는 믿음의 이중의 도약은 타자에 대한 대칭적, 비대칭적 관계를 모두 강조한다. 반면 데리다의 단일의 운동인 도약은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만을 강조한다. 두 철학자에게 타자는 핵심 개념이다.

먼저 데리다로부터 출발하자면, 타자의 자리와 역할은 그가 “Che cos le la Poesia?”에서 “poematic 순간”에 대하여 쓸 때 분명하다. 고슴도치는 타자의 부름을 받고 타자 때문에 길을 건너간다. 그녀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하지만 차가 많이 왕래하는 고속도로에서 위험천만하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불가결정성(indecidability)” 심연 앞에서 몸을 공 모양으로 감는다. 이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어쩌면 달리는 것보다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은 또한 연약함과 내면성을 나타낸 것이다.

데리다에게 인간은 탈중앙화된 사람이고, 자기 현존(self-presence)이나 정체성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차이와 타자성에 의해 정의된다. 고슴도치는 로드킬될 수 도 있는 위기에서 타자를 위해 길을 건너는 여정 가운데 있다. 그녀는 축복기도(itinerarium)를 받고 타자의 부름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서 “itinerarium”의 “iter”가 산스크리트어로 “타자”를 의미한다.

데리다에게 순간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타자다. 플라톤의 철학은 새로움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진리와 정의를 향한 운동은 단지 영혼이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동굴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단지 영혼이 잃어버렸던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다.

헤겔 역시 새로움을 설명하려 한다. 그는 이 새로움이 급진적으로 타자(다른 것)가 되기를 바란다. 도토리나무가 될 도토리나 피닉스의 재탄생은 그에게 충분하지 않다. 그의 Aufhebung(지양)은 새로움의 기적의 “화체설”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변화의 개념은 아무리 이것이 자연적인 과정을 넘어선다 해도, 내면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한 창조적 순간을 갖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전히 도토리나무가 될 도토리와 유사하다.

데리다는 사건이 아닌 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나의 지식이나 잠재 의식을 제외한 무언가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창의적인”이나 “시적인”이라는 단어 역시 너무 적극적이어서 책임의 순간에 존재하는 새로움(newness)을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데리다에게 타자는 급진적 타자다.

헤겔이 말하듯이, 우리는 상호주관적 주체(intersubjective subject)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상호주관성은 단지 지식의 인지과정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새로움의 순간은 망각하는 중에 타자에 의해 나에게서 나올 때만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다.

“poematic”이라는 용어는 “poetic”이라는 용어보다 더 수동적이다. 이 단어는 “poetic”이나 “creative”라는 단어보다 책임의 순간의 새로움을 더 잘 표현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도토리나무가 이미 도토리 속에 있는 것처럼 새로움이 내 안에 있음을 함의하고 있는 적극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급진적 타자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나의 잠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행위가 되는 잠재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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