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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

비학문적 후서 (1)

by 엉클창 2020. 7. 14.

 

이 글은 비학문적 후서 554쪽 이하를 번역한 것이다. 이 부분은 종교성 A와 종교성 B에 대한 설명이다. 


The Intermediate Clause[MELLEMSÆTNING]

여기에 제시된 문제(2부, 4장을 보라)는 실존 문제였고 그만큼 정열로 가득 차있고(pathos-filled) 변증법적이다. 첫 번째 부분(A), 정열로 가득 찬 부분, 영원의 행복과의 관계는 논의되었다. 지금 우리는 변증법적인 부분(B)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부분이다. 지금까지 논의해왔던 종교성(religiousness)과 이제부터 요약을 위해 종교성 A라고 부를 수 있는 종교성은 특별히 기독교의 종교성이 아니다. 반면에, 정열이 가득한 것과 결합하고 새로운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 변증법적인 것이 결정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부분을 동시에 알지 못한다. 종교적인 언급(address)은 파토스로 가득 찬 것을 제시할 것이고 변증법적인 것을 선을 그어 지운다. 따라서 이따금 모든 종류의 난잡하고 시끄러운 정열, 미학, 윤리학, 종교성 A 그리고 기독교, 이런 것들이 아무리 잘 계획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이따금 자기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랑스러운 구절들이 있다.”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실존해야만 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사랑스럽다. 변증법적인 것은 은밀하고 아이러니하게 몸짓과 허풍(big words)을 흉내 냄으로써, 무엇보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아이러니하게 비판함으로써, 보복한다. 그것은 잘 들을 수는 있으나 행할 수는 없다. 

과학적 학문은 변증법적인 것에 책임을 지려 한다. 결국 그것을 추상의 매개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로 인해, 이 문제는 다시 혹사당한다. 이것은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현실적인 변증법적 어려움은 추상의 매개로 설명함으로써 사라진다. 이것은 실존을 무시한다. 격한 종교적 이야기가 땀을 흘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감정적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사변적인 해석은 순수한 사상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도 아닌 것은 행함을 위한 것이고, 행함에 의해서 실존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파토스가 가득한 것과 변증법적인 것의 차이는 더 특별하게 그 특징이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성 A는 비변증법적인(undialectical) 것이 아니니까. 다만 역설적으로 변증법적이지 않다. 종교성 A는 내적 성숙(inward deepening)의 변증법이다. 이것은 무언가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는 영원한 행복과의 관계이나 그 관계의 변증법적인 내적 성숙이다. 결과적으로 변증법적인 내적 성숙에 의해서만 길들여질 뿐이다. 

반면 지금부터 부르게 될 종교성 B는, 혹은 지금까지 불러왔던 역설적 종교성은, 혹은 두 번째 자리에서 변증법적인 것을 지닌 종교성은, 이 조건(conditions)이 내적 성숙의 변증법적인 집중이 아니라, 더 특별하게 영원한 행복을 규정짓는 명확한 것이 되는 방식으로 조건을 만든다. (반면, 종교성 A에서는 내적 성숙의 더 특별한 규정이 더 특별한 규정일 뿐이다.) 이것을 특별히 개인에게 적용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더 특별하게 영원한 행복을 규정함으로써 조건을 만든다. 이것은 사유에 의한 과업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새로운 파토스를 물리치고 그것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종교성 A는 변증법적인 B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어떤 성찰이 있기 전에 개인 안에 먼저 현존해야 한다. 실존적 열정의 가장 결정적인 표현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영원한 행복과 관계할 때, 두 번째 자리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인 것이 그를 모순의 열정으로 몰아넣는지를 깨닫는 성찰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파토스가 없는 자가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과 관계하기를 바란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자명하다. 왜냐하면 이를 알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어떤 질문이 있기 전에  무엇보다 종교성 A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성 A는 이교도에서도 제시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이것은 침례를 받든 말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의 종교성일 수 있다. 안락하게 싼 값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주 쉽다. 최고의 것이나 다름없이, 그는 결국 침례를 받고, 성경 한 권을 받았고, 선물로 찬송가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복음적인 루터교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관련된 사람의 일로 남는다. 내 생각에, 종교성 A는(내가 이 경계 안에서 실존하고 있다) 사람에게 너무 힘들기에, 언제나 그 안에는 충분한 과업이 있다.

나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에게는 쉽고 우둔한 자에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적으로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보면, 그의 이해와 사고를 포기하는 것, 모순 가운데 있는 그의 영혼에 집중하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많은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 가장 어렵다. 기독교에 대해 이해를 상실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 아님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이것이 나의 목표다. 즉, 상상력이 풍부한 건축가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바, 어떤 계획을 가지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모자란 사람,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같은 과업이 각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비교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대신에, 똑똑한 사람이 모자란 자를 자신과 비교할 때처럼, 오해는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가 이해한 것과 가기 이해하지 못한 것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도출한다. (물론, 이것은 그의 최고의 노력, 이런 고달픈 집중의 열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의 두 명의 제안자인 소크라테스와 하만 사이에 2000천년이 놓여 있다.) [# 보기 다음을 참고하라. Johann Goerge Hamann, Socratische Denkwürdigkeiten für die lange Weile des Publicums zusammengetragen von einem Liebhaber der langen Weile. . . , Hammann’s Schriften, I-VIII, ed, Fridrich Roth and G. A. Wiener (Berlin, Leipzig: 1821-43; ASKB 536-44), II, p. 12; Hammann’s Socratic Memorabilia, tr. James C. O’Flaherty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67), p. 143; “소크라테스는 신사였고 평범한 비평가가 아니다.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하 쓸 때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과 이해한 것을 구별했다. 그리고 이해 가능한 것과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적절한 추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다음을 참고하라. Plato, Apology, 21 c-d; Opera, VIII, pp. 108-09; Dialogues, pp. 7-8.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Anxiety, p. 3 and epigraph note, p. 222, KW VIII(SV IV 276); Pap. IV B 128; JP II 1553-55 (Pap. V B 43-45). 그의 이해와 사고에 반하여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그가 이런 모순에 그의 목숨을 건다면, 그의 운동은 모순 덕분이며, 그가 선택했던 이 모순이 모순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다면, 본질적으로 속은 것이다. 이 모순이 기독교라면, 그는 믿는[# 보기 믿음의 정의에 대해서는 2장 2절과 3장의 이상과 실재에서 밝힌 바 있다. 이 논의는 다음과 같다: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단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쉽고 부드러운 과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아니, 반대로, 그것은 정반대다. 허구한 날 자기 자신과 영원한 행복이 토대를 이루는 것과 관계하는 것, 그러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열정을 품는 것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특별히 지금은 그것을 이해한 것과 같은 착각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가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고 이해한다면, 그 자체로 더 이상 믿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침례를 받고, 교리문답을 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기다리던 새로운 찬송가라 해도 그렇다. 다시 한 번 그가 착각과 오해로서 이해를 제거하고 스스로를 기독교적 모순과 관계할 때까지 그렇다. 다시 말해, 종교성 A가 역설적 종교성을 위한 시작점(terminus a quo)으로서 들어오지 않는다면, 종교성 A는 종교성 B보다 더 높다. 왜냐하면 저 경우, 역설, 모순과 같은 것은 탁월한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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