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강화/기독교의 공격

키르케고르의 <기독교의 공격>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by 엉클창 2021. 10. 21.

1. 소개

이 작품은 키르케고르가 1848년 저술한 <기독교 강화> 제 3부 “뒤에서 상처를 주는 생각-덕을 세우기 위하여(Tanker som saare bagfra- til Opbyggelse)”를 번역한 것입니다. 전체 4부의 강화 중에서 이 작품은 가장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일기를 보면, 그는 이런 비판적인 내용으로 인해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기독교 강화>에 이 작품을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사랑의 역사>의 도발

그가 이렇게 고민했던 이유는 1847년의 작품이었던 <사랑의 역사>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냥 일반적인 기독교의 사랑에 대해 서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책입니다. ‘사랑의 역사’란 쉽게 번역한다면 ‘사랑의 행위’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덴마크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덴마크는 전체 국가가 이미 기독교 국가였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덴마크는 루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루터는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 서신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할 만큼 행위가 아닌 믿음을 강조한 사람이었습니다. 행위는 위험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믿음이나 은혜보다는 쉽게 공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위’를 전면의 제목을 등장시킨 것은 도발적인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키르케고르가 얼마나 행위를 강조했던지 그만큼 야고보서를 좋아하고 야고보서를 많이 인용해서 글을 쓴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사랑의 역사>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행위가 생략된 덴마크 국교회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사랑의 역사>는 그 당시에

얼마나 도발적인 책이었을까요? 도대체 ‘사랑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만드는 걸까요? 아마 오늘날 독자들에게 제시해도 아찔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찬양하기에 바쁩니다. 세상의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사랑을 소재로 다루지 않는 것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에서나 교회에서 사랑에 대한 논의가 있다 해도, 키르케고르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은 생략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면 교회로 인해 변화된 세상을 보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키르케고르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사랑을 실천하면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에 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더욱 핍박받고 세상에서 매장 당한다는 겁니다. 그는 그 당시 교회가 이것을 생략했고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긍정적인 이야기만 했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 당시에 공식적인 교회가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을 생략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만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철저한 자기부인(self-denial)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철저한 자기부인이란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이중의 자기부인’입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이중의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들 들어,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역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며 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인 자기부인은 이중의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희생했으나 결국 국가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자기부인도 이기적인 사랑의 욕망, 갈망, 계획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면적인 자기희생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이일로 인해 세상에서 존경을 받고, 명예를 얻고,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처럼 사랑을 받습니다.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중의 위험 가운데 노출됩니다. 첫째, 그는 이 길을 가기 위해 독립 운동가들처럼 그의 내면성 안에서 자기희생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곧, 그분을 본받아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할 정도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이 사랑을 실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상은 독립 운동가들처럼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한심한 사람, 정신 나간 사람 혹은 심지어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처럼 범죄자로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런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세상이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이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뭔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여기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중의 자기부인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를 희생할 정도로 내면성에서 자기를 부인하면서도 세상에서도 버림받는 ‘운명’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다 죽으면 세상은 그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사랑의 역사>에서 말하고자 했던 ‘사랑의 행위’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것을 그 당시 교회가 생략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는 이중의 자기부인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자로서 평가하지면 키르케고르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의 그런 비판과 지적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성도들이 듣기 어려워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부드러움과 도발

그가 <사랑의 역사>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이런 ‘날선 도발’을 하다 보니, 다음 해인 1848년의 <기독교 강화>는 <사랑의 역사>보다는 부드러운 강화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처음의 기획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인 <기독교의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평가하자면, <사랑의 역사>와 같은 ‘도발적인’ 작품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역사>와 같은 도발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마지막까지 이 작품을 <기독교 강화>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그는 마음을 바꿔 <기독교 강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을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그의 일기를 참고하면,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성전청결 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4부의 강화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아직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4부는 기막힌 ‘위로’를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찬의 위로’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성전을 깨끗이 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부여한 강화가 <기독교의 공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일기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썼던 3부를 <기독교 강화>에 넣는 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명확히 있어야 할 자리였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적이 없었으나 섭리가 그렇게 되도록, 내가 기독교 강화를 출판하려고 할 때 이 작은 책이 준비되도록 명한 것이다. 3부가 없었다면, <기독교 강화>는 너무 부드럽다. 그리고 나에게도 안 맞다. 이 강화는 현 상황에서 충분히 부드럽다. 3부의 거대한 취지와 4부의 은폐된 내면성보다 더 적절하게 병치를 이룰 수 있는 강화를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4부의 강화가 금요일의 성찬이기 때문이다. -JP V 6112(Pap. VIII1 A 560) n.d., 1848

 <기독교 강화>의 3부와 4부의 대조는 가급적 날카롭고 강렬하다. 첫째 성전청결의식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다음으로 조용하면서도 모든 예배들 중에서 가장 친밀한 예배가 있다. 즉, 금요일의 성찬 예배다. -JP V 6121(Pap. VIII1 A 590) n.d., 1848  

4. 모토(Motto)

이 작품은 2부의 <고난의 기쁨>처럼 서문이 없는 책입니다. 서문 대신에 모토가 서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토는 서문을 대체할 만큼 중요하고, 이 글을 해석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토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방어가 필요 없다. 어떤 방어로도 도움을 받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은 공격이다. 기독교를 방어하는 것은 모든 왜곡들 중에서 가장 옹호할 수 없고, 가장 역전된 형태고, 가장 위험하다. 이것은 무의식중에 생간 교활한 반역이다. 기독교는 공격자다.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 기독교는 뒤에서 공격한다.

먼저 이 모토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는 이미 1847년에 저술한 <사랑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비참하게 낭비된 박식함과 총명함이여! 기독교를 방어하기 위한 거대한 작업에 슬프게 낭비된 시간이여! 기독교가 실족의 가능성으로 무장하고 다시 나타난다면, 그리하여 이 공포가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만 있다면, 그때 기독교는 방어가 필요 없을 것이다. 반면, 박식해질수록, 방어는 더욱 필요하고, 기독교는 더욱 왜곡되고, 폐기되고, 내시처럼 힘을 빼앗기고 거세될 것이다. 단지 친절한 마음에서 나온 방어는 실족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원한다. 하지만 기독교를 절대 방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일찍이 선택을 제공하고, 끔찍하게 선택을 강요한 것처럼, 다시 말해, 실족하든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든가 제시한 것처럼, 기독교가 공격할 때, 스스로를 방어하고, 그들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에서 실족의 가능성을 제거해 보라. 혹은 죄의 용서에서 고통스런 양심의 싸움을 가져가 보라. 그러면 교회의 문을 닫는 것이 더 낫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다. 아니면, 교회를 하루 종일 문을 여는 오락실로 바꾸는 것이 더 좋다!

이와 같이 <사랑의 역사>의 도움으로 이해할 때, ‘실족의 가능성’이 기독교의 공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과 25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고,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를 참고하면 이 단어는 분명 ‘실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마 26:33)말합니다. 이때 ‘버리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는 ‘실족하다’와 같은 동사인 σκανδαλιζω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실족해도, 나는 절대 실족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족의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키르케고르만큼 실족을 하나의 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실족을 제거할 때, 기독교가 타락한다고 말합니다. 가명의 저자 안티 클리마쿠스의 목소리로 전한 <기독교의 훈련>은 실족에 대한 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의 실족에 관한 이야기는 <기독교의 훈련>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 <철학의 부스러기>와 같은 사상서와 <사랑의 역사>, <기독교 강화>,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등 다양한 그의 이름으로 낸 강화에서도 등장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바 있습니다. 

5. 기독교의 공격

이 작품은 그 당시 덴마크 교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덴마크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죄를 깨닫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공격>은 처음부터 '죄의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공격자일까요? 역사로서 저는 <사랑의 역사>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처음 1장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실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위험한 책입니다.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제시한 기독교를 본질적인 기독교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실족하든가 양당 간의 선택의 기로에 서도록 강요합니다. 어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으로 기독교를 방어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키르케고르는 7장의 제목인 “그는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는 디모데전서 3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 연구하고 탐색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연구할수록 오히려 이 말씀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믿는 자였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이 말씀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 ‘미친 짓’은 아닌지 반문합니다. 마지막 결론에서 그는 믿을 필요가 없는 채로, 이 말씀을 계속해서 연구하는 것은 학적이면서 박식한 연습이요, 위법행위요, 비겁하고 비인간적이고 그 정도로 사악한 무기력이라고 말합니다.  

한 예를 들었으나 이 책은 키르케고르가 나름대로의 실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항상 ‘권위가 없는 자’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책 역시 권위가 없었기 때문에 설교라 말하지 않았고, 그냥 이야기(강화)라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릅니다. 권위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실족을 강화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말씀의 권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강화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각 장의 제목을 말씀을 인용하고 있고, 말씀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공격자로 만들기 위해 말씀의 권위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 강화의 공격포인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원제목의 중요성을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책의 원제목이 "뒤에서 상처를 주는 생각-덕을 세우기 위하여"입니다. 제목에 보면 대시(-)가 있고 뒤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역사가 볼 때, 대시 뒤에 나오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에 해당하는 것이 공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각 장의 제목에 보면 1장과 7장을 제외하고 2~6장은 제목에 대시(-)있습니다. 역자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제목에 나타난 대시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시 뒤에 나오는 말이 공격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6. 더 끔찍한 것

이 책이 어떻게 기독교의 공격을 제시하는지 1장을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역자로서 <기독교의 공격> 1장은 <고난의 기쁨> 1장과 상당히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출간된 <고난의 기쁨> 1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확히 덕을 세우는 일이란 무엇인가? 덕을 세우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이것이다: 그것은 끔찍한 것이다. 덕을 세우는 일은 건강한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한 것이다. 강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위한 것이다. 건강한 자와 강한 자에게는 아마도 이것이 먼저 끔찍한 것처럼 나타나야 한다.

키르케고르에게 ‘덕을 세운다’는 말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나온 말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은 헬라어로 οικοδομεω라는 단어로 기독교 교회론의 핵심이 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 말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끔찍한 것’에 대해 집중해서 논의하자면, 이 말은 ‘죄의 자각’ 혹은 ‘죄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기쁨> 1장에서 보면, 죄의 용서가 있는 것, 이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며 끔찍한 것이란 죄가 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의 기쁨>에서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고난이 아무리 끔찍하다 할지라도 이 고난이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각 강화마다 “오직 죄만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불길한 예감 혹은 징조 같습니다. 다시 말해, <고난의 기쁨>에는 등장하지 않는 어떤 더 끔찍한 것이 나타날 것 같은 징조입니다.

바로 더 끔찍한 것이 <기독교의 공격> 1장에 해당됩니다. <기독교 강화> 1부의 강화인 <이방인의 염려>와 2부의 강화인 <고난의 기쁨>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공격>은 더 끔찍한 것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7. 어째서 죄의 문제가 더 끔찍한가?

2부의 작품인 <고난의 기쁨>에서의 고난은 마치 욥과 같은 고난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의인의 고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핍박당하고 고난당한 자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올 때는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아무리 버림받고 핍박을 당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는 평안을 찾고 위로를 발견하기 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공격>의 1장은 이렇게 평안과 위로의 장소로 하나님의 집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키르케고르는 그 당시에 교회의 건축 양식에 대해 비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건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웅장합니까? 오늘날도 대형교회를 지을 때 얼마나 웅장하게 건물을 짓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는 보장하지 못하는 어떤 ‘안전’이 교회당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집에 어떤 위로가 있다는 것을 키르케고르가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강화> 제 4부의 강화가 이런 위로를 말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무리 죄 없이 고난당한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집에 들어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는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 교회의 잘못 중에 하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서만 발견되는 ‘위험’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위험은 세상이 발견하지 못하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던 겁니다.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조심하라. 외부에 존재하는 공포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어도, 세상에서 발생한 일 중 가장 끔찍한 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어도, 당신은 더 끔찍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 여호와의 집에서는 본질적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위험과 비교할 때, 세상에서의 위험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어린 아이의 장난이다. 곧, 이것은 죄의 위험이다.

여러분, 이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욥처럼 의인의 고난을 당했다고 확신했던 자, 죄 없이 결백한 고난을 당했다고 확신했던 자, 그가 평안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으나 무엇보다 그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발견할 때, 이것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하지만 이런 끔찍한 일을 먼저 당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주는 위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역자로서 이것이 1장의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1장에서의 기독교의 공격은 곧 ‘죄의 자각’입니다. 1장에서의 키르케고르의 기획은 분명합니다. 독자를 죄를 일깨울 수 있는 곳까지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1장에서의 실족의 가능성은 바로 죄의 자각입니다. 1장을 읽으면서 이 작품에서 말하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거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분노하거나(실족하거나). 따라서 나머지 장들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강화는 이런 ‘공격’에 해당합니다. 각 장에는 이런 ‘공격’ 포인트가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각 장마다 가차 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이 책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 정리해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