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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기독교의 공격

<기독교의 공격> 1장 해제

by 엉클창 2021. 10. 28.

 

이번 시간에는 <기독교의 공격> 1장에 의미를 다루고자 합니다. 성서의 본문은 전도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1장의 제목은 이 말씀의 인용문인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입니다. 1장 역시 많은 내용을 다룰 수 있으나 모토와 관련하여 1장이 어떻게 기독교의 공격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키르케고르가 살았던 그 당시 덴마크 상황이나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이나 비슷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지켜줄 수 있는 "영원한 안전"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당 분위기만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도 많은 고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믿는 자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보호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쉴 수 있는 안식처와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공격》 1장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위험에서 도피해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왔지만 교회는 세상에서 발견하지 못한 더 끔찍한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그 당시 덴마크 교회가 영원한 안전만 설교했지 하나님에 집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이 끔찍한 위험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발견될 수 없는 더 끔찍한 위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발견, 혹은 죄의 자각입니다.

역자가 생각하기에, 1장에서의 공격 포인트는 바로 '죄의 자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기독교 강화》 1부의 작품인 《이방인의 염려》와 2부의 작품인 《고난의 기쁨》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3부의 작품인 《기독교의 공격》은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1부와 2부의 작품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고난의 기쁨》에서는 "덕을 세우는 일"이란 끔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보기 "본질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은 확실하고, 그 자체로 신뢰할 만하다. 마치 끔찍한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것처러,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덕을 세우는 일이 더 즐겁게 되기를 바라면서 소심하게 끔찍한 것을 멀리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덕을 세우는 일은 끔찍한 것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고난의 기쁨》, 49쪽]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공격》 원 제목이 "뒤에서 상처를 주는 생각들-덕을 세우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제목을 보면 대시(-)가 있고 뒤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대시 뒤에 있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가 끔찍한 것에 해당되고 역자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 뒤에 나오는 것들이 기독교의 공격에 해당된다 봅니다. 《기독교의 공격》 각 장의 제목을 보면, 1장과 7장을 제외하고 2~6장 전체에는 대시가 있고 뒤에 어떤 말이 등장합니다. 1장에는 대시가 없지만 "더 끔찍한 것"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조심하라. 외부에 존재하는 공포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어도, 세상에서 발생한 일 중 가장 끔찍한 일로부터 도망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왔어도, 당신은 더 끔찍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 여호와의 집에서는 본질적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위험과 비교할 때, 세상에서 위험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어린 아이의 장난이다. 곧, 이것은 죄의 위험이다.

 

도대체 죄의 문제가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 시간에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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