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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화/기독교의 공격

최고선이란 무엇인가?(칸트)

by 엉클창 2022. 3. 1.

 

최고선이란 무엇인가(아리스텔레스) 최고선이란 무엇인가(키르케고르)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천 이성의 대상, 객관은 최고선이다. "순수 실천 이성으로서 이성은 (경향성과 자연적 필요에 기인하는) 실천적으로-조건 지워진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조건자를 찾는바, 그것도 의지의 규정 근거로서가 아니라, 이것이 설령 (도덕 법칙에서) 주어졌다 할지라도, 순수 실천 이성의 대상의 무조건적 총체를 최고선의 이름 아래서 찾는다."(194) 물론 이때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선이 실천이성을 규정하는 규정 근거라는 의미는 아니다. 실천 이성을 규정하는 근거는 오직 도덕 법칙일 따름이다. 그러나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되는 실천이성도 객관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그 객관이 최고선인 것이다.

"도덕 법칙은 순수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이다. 그러나 도덕 법칙은 순전히 형식적이므로 (곧, 준칙의 형식만을 보편적으로 법칙 수립적인 것으로 요구하므로), 그것은 규정 근거로서 모든 질료를, 그러니까 의욕의 모든 객관을 도외시한다. 그러니까 최고선은 항상 순수 실천 이성의, 다시 말해 순수 의지의 전 대상이겠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 의지의 규정근거로 간주될 수는 없다. 도덕 법칙만이 저 최고선과 그것의 영향 내지 촉진을 객관으로 삼게 하는 근거로 보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 주의는 윤리적 원리들을 규정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경우에는 – 이런 경우에서는 아주 작은 오해조차도 마음씨를 그릇되게 만든다 – 매우 중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분석학에서 알아냈던 바는, 만약 우리가 도덕 법칙에 앞서 어떤 객관을 선의 이름 아래 의지의 규정 근거로 취하고, 이로부터 최상의 실천 원리를 도출한다면, 그때 이것은 언제나 타율을 불러 들여와 도덕 원리를 떼밀어내는 것이 될 터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최고선의 개념 안에 도덕 법칙이 최상의 조건으로서 이미 함께 포함되어 있다면, 그때는 최고선은 객관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개념 및 우리의 실천 이성에 의해 가능한 그것의 실존에 대한 표상이 동시에 순수 의지의 규정 근거이기도 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실제로 다른 어떤 대상이 아니라 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함께 생각되고 있는 도덕 법칙이 자율의 원리에 따라 의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의지 규정에 대한 개념들의 이 순서를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완전무결한 조화 속에서 서로 병존해 있음에도, 이를 오해하고, 서로 모순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196, 197)


그렇다면 이때 최고선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덕과 행복의 일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최고는 최상(最上)을 의미할 수도 있고, 완벽(完璧)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는 자체로 무조건적인, 다시 말해 다른 어떠한 것에 종속되지 않는 그러한 조건 (곧, 原本)이다. 후자는 같은 종류의 더 큰 전체의 어떤 부분이 아닌 그런 전체 (곧, 完全)이다."(198) 그런데 "무릇 덕과 행복이 함께 한 인격에서 최고선을 소유하고, 이 경우에도 행복이 (인격의 가치이자 인격의 행복할 자격인) 윤리성에 정비례하는 몫을 가지고서 가능한 세계의 최고선을 형성하는 한에서, 이 최고선은 전체, 곧 완전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도 덕은 언제나 조건으로서 최상선이다. 왜냐하면, 최상선은 자신 위에 더 이상의 조건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는 유쾌한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관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덕 법칙에 알맞은 거동[태도]을 조건으로 전제하는 것이다."(199)

즉 최고선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최상선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덕을 성취하는 것이 최상선이다. 덕을 성취하는 것이 일단 도덕의 목표이고 덕을 성취하게 되면 최상선에 도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최고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 덕에 의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에게 행복까지 따라 올 때 그야말로 제대로 된 완벽한 선이 실현되어 최고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복을 윤리학의 필연적인 요소로서 고수한다. 하지만 칸트는 도덕의 원천을 행복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최상선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성으로서의 덕이다. 더 나아가 도덕성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인간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나 실제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행복이 행복할 가치와 필연적으로 비례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덕은 최상선을 의미할 뿐 완전한 선, 즉 최고선까지 의미하는 않는다. 최고선은 행복과 도덕성이 일치하는데서 성립한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덕에 따라서 보상받는다. 그래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할 자격이 있음으로써) 덕은 우리에게 오로지 소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의 최상 조건이고, 그러니까 또한 행복을 얻으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의 최상 조건이며, 그러니까 최상선이라는 것은 분석학에서 증명되었던 바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덕이 이성적 유한존재자인 욕구 능력의 대상으로서의 전체적인 완벽한 선은 아니다. 그런 것이기 위해서는 행복이 추가로 요구되기 때문이며, 그것도 한낱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인격의 당파적 안목에서가 아니라, 세계 내의 인격 일반을 목적 자체로 여기는 무당파적 이성의 판단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필요로 하고, 또한 행복할 자격이 있으나, 그럼에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 – 우리가 시험적으로라도 이러한 존재자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존재자는 전권()을 가질 터다 – 의 완전한 의욕과는 전혀 양립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198, 199)

[네이버 지식백과]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칸트 『실천이성비판』 (해제), 2004., 박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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