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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s and papers

If the lily could speak(2)

by 엉클창 2020. 2. 17.

이런 표준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를 "유머스러운 것"으로 기획했다는 것은 무언가 애매한 점이 있다. 반면, 이는 유머의 첫 번째 형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존 영역에 대한 클리마쿠스의 도식에 따르면, 이런 유머의 형태는 즉각적으로 윤리적 아이러니나, 미행으로 아이러니가 있는 윤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일기에 따르면, 이를 통해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1부를 구성하고 있다. 

반면, 2부는 조금 더 적절하게 유머의 두 번째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혹은 이 유머는 종교성의 미행인 것처럼 보인다. 3부에 나오는 것이 명백히 기독교적인 것으로 기획되었고, 이 형태의 유머는 기독교적 종교성의 최종 출발점terminus a quo으로 봉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부와 관련된 다른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이 강화가 진지함earnestness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런 판단은 진지함이 무엇인지 얄팍한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진지함이란 결국 금전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공적인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 모금운동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찬양받을 만 하지만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진지함은 아니다.1)

키르케고르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2부의 강화는 그 의도에 있어 심각하거나 진지한 것으로 기획되었다. 클리마쿠스의 도식에서 생각해보면, 2부는 그 자체로 유머라기보다 미행으로 유머를 갖고 있는 종교성의 예로 자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평가가 올바르다는 것은 강화를 조사함으로 입증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적절하게 생각해 보자. 

하지만 먼저, 실존 영역에 대한 클리마쿠스의 범위와 비교함으로써 결정된 것보다 2부의 유머러스한 특징에 대해 더 단순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위에서 인용된 첫 번째 일기에서, 그는 이 강화가 선생과 배우는 자 사이에 정상적 관계의 반전이라고 말한다. 이는 2부의 유머와 모순의 토대를 제공한다. 

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자가 자기 자신과 선생을 가장 가까운 종류genus oroximum의 이상으로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이 같은 종류 안에서 더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배우는 자 아래에 서자마자, 상황은 유머러스해진다. 예를 들어, 아이나 멍청이한테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나 멍청이는 유머러스하게만 선생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선생과 배우는 자가 같은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이질적으로 서로 역으로 관계할 때, 훨씬 더욱 유머러스하다. 이것이 명확히 유머러스한 관계다. 바로 새와 백합이다. (JP, 5:5975)

바로 이것이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이질적인 피조물에게 배워야 하는 인간의 모순인 것이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는 2부의 강화에 이런 유머러스한 특징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실존영역의 더 넓은 영역과 관련항, 구조적으로 어디와 관련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내재적으로 종교적인 것과 보편적인 인간적 상황을 구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런 인간적 상황에서 저 유머는 표현되고 건덕적 목적으로 활용된다. 

키르케고르가 2부의 강화를 기획할 때, 그는 2부의 세 강화를 각각 실존 영역의 세 부분을 반영하여 기획했다는 점이다. 이 강화가 그 성격에 있어 유머러스하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심미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클리마쿠스의 도식에서 살펴보았듯이, 실존적인 관점에서의 유머는 심미적인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위치에 있다. 이 강화가 아무리 심미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더라도 그렇다.

첫 번째 강화가 심미적인 풍미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 새와 백합의 직접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 강화 모두 인간의 선생으로서 새와 백합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Gregor Malantschuk의 견해를 따르면, 전체 2부의 내재적인 종교적 성격(미행으로서의 유머로)은 심미적인 것이 조금 더 고차원적인 관점에서 첫 번째 강화에 다시 논의되고 언급된다는 점이다. 이 관점은 다음에 나오는 윤리적인 강화와 종교적인 강화에서 더욱 깊이 있게 수행된다. 이 강화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이것이 어떻게 그런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주 그의 독자를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곳은 심미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첫 번째 강화에서 그는 "염려하는 자"에게 말한다. 그는 삶의 어떤 면에서, 혹은 생계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자다. 키르케고르는 이 사람으 새와 백합에게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설득한다. 그들은 길쌈도 수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된다.

 

 

 

 

1) JP, 5: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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