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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s and papers

Point of View(관점), Introduction(3)

by 엉클창 2020. 2. 4.

간접 전달이 직접 전달보다 더 열등한 것이 아니어도, 전달자와 전달의 본질에 의해 정의된 한계가 있다. 거기에는 어떤 "악마적인 것이 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나쁜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도 이와 같다."1) 

 

 

 

 

 

 

1) 이 부분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간접전달Indirect Communication
직접 전달이 간접 전달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진실은 간접적 도구를 꽤나 잘 사용한 어떤 사람도 태어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평생 그것을 활용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필요하다. 이미 직접성directness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오직 사람되신 하나님the God-man만 모든 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간접전달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이 그분이 필요했다. 그분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그분의 개념을 따라 사랑한다. 따라서 그분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개념에 대해 눈곱만큼도 바꾸지 않았다. 실족의 가능성을 포기할 만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곧, 종으로 가장한 그분의 실존이 실족의 가능성이다.
사람이 간접적 도구를 사용할 때,이런 저런 악마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나쁜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도 이와 같다.
직접 전달 때문에 삶은 더욱 쉬워진다. 반면, 직접전달의 사용은 아마도 이기적으로 간접전달을 사용해왔던 사람에게는 굴욕적일 수 있다.(아마도 악마적으로 나쁜 의미에서)
나는 종종 직접전달을 사용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할 때조차, 완전히 달성된 적도 없고 잠시 동안 직접전달이 있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해도)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내가 버티면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에 교만이 깃들어 있는지는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감히 이것을 부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자가 누구일까?
나의 삶을 회상해볼 때, 내 뒤에 무언가 더 고차원적인 것이 숨겨 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무엇을 했는가? "현재로서는 나는 이런 가능성을 방해할 어떤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성숙한 직접전달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어부가 찌의 움직임을 볼 때의 상황과 같다. 찌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물고가가 물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마도 물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부가 말한다. 

"나는 줄을 당기지 않을 것이다. 당긴다면, 이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은 물고기가 물었는지 입증할 것이다." 

내 안에서 간접전달은 본능적이었다. 왜냐하면 작가가 됨으로 나는 스스로를 발전시켜왔고 결과적으로 전체 운동은 뒷걸음질쳤기backward때문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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