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Journals and papers

Point of View(관점), Introduction(2)

by 엉클창 2020. 1. 25.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번째 판이 이와 함께 따라오는 것 없이 출판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쨌은 요점은 내가 종교적 작가가 될지 마음에 결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내가 교회론적인 지점을 구했던 것은 이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에 나왔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 . 
그러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두 번째 판은 결정적인 지점이다. (내가 실제로 이것을 근본적으로 고려했고, 이와 함께 더불어 출판될 "관점"을 썼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두 번째 판을 출판하는 데에 진지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기회가 활용되지 않는다면, 내가 쓴 모든 것은 전체를 고려할 때, 심미적인 것으로 끌어내려질 것이다.1)

 

하지만 그때에 과업은 괴로울 정도로 복잡했다. 간접 전달(가명성pseudonymity)과 직접전달에 대한 지속된 고찰reflection과 전체 그의 저작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만들었던 가장 귀중한 것"2)인 1848-49년 전체의 작품과 함께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문제 때문이었다. 죽음이 곧 임박했다고 생각했기에 또한 이런 문제들에 대해 특별히 긴급하게 여겼다.4) 

직접전달과 간접전달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관점은 과업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잘 서술되어 있다. "내가 제시했고, 여전히 제시하고 싶은 것이 기독교다. 나의 매일의 시간이 그랬고, 언제나 그 방향이었다."5) 소크라테스적 간접적 도구화 함께, 그는 가명이면서, 심미적 접근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그가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착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기만deception, falsum을 지닌 작가로, 경건한 속임수pious fraud, pia fraus를 지닌 작가로 나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상황은 소위 국가교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상상에 고착되어 그들을 일깨우려면 많은 기술들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로 명성을 얻지 못한 자가 즉각적으로 기독교 작가로 시작한다면,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발언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경계를 하며 말할 것이다. "그건 우리에게 맞지 않아."
나는 심미주의자로 시작했다. 그때 특별히 민첩하게 종교적인 것에 접근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임을 거부했다.6)

착각 속에서는 산파술이 최고다.7) 산파술은 독자를 그 과업과 함께 홀로 남겨둔다. 작가의 개성과 개인적 삶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8) 

 

1) 다음을 참고하라. 보충, p. 185-86 (Pap. X1 A 147)

2) 다음을 참고하라. 
아마도 그때, 자주 언급했듯이, 완료된 상태로 남아 있는 모든 작품들(내가 만든 가장 귀중한 것3))은 또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그것들이 시적인 것으로 간직할 수도록, 시적인 일깨움이 되도록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JP VI 6337 (Pap. X1 A 95) n.d., 1849

3) 이에 해당하는 것은 "Armed Neutrality," "The Point of View," Practice in Christianity," 그리고 "A Cycle of Ethical-Religious Essays"이다.

4) 다음을 참고하라. 보충, p. 164 (Pap. IX A 216)
그래, 이것은 이런 식이어야 한다. 나는 종교적 작가가 된 적이 없었다. 나는 이랬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더불어 <두 개의 건덕적 강화>가 나왔다. 종교적인 책만을 쓴지 2년 후, 배우에 데 대한 작은 글이 나왔다.
지금은, 순간, 쉬어야 할 때다. 이 단계에까지 나는 나 자신을 아는 법을 배웠고, 더욱 구체적으로 아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출판은 진행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더욱, 활용되어야 할 것을 끝마쳤다: (1) 윤리-종교적 소론의 전집 (2) 죽음에 이르는 병 (3) 여기로 오라, 너희 모두....) 내가 먼저 죽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나의 건강이 안 좋다. 나의 죄에 대해 슬퍼하고, 기독교를 제시하는 일에 더 열심을 내는 데에 이 반년을 활용해야 한다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참으로 실망스런 생각이다. 출판과 관련하여 이런 유한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이로인해 괴롭다.
다음 출판은 외적인 삶에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재정적으로 최악이 될지라도, 나는 언제나 목회적 소명을 구할 희박한 가능성에 의지했었다. 마지막 책을 출판할 때, 내가 아무리 이 소명을 구한다 해도, 이 소명이 거절되어도 좋다. 그리하여 문제는 예전과 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감히 이 임무를 수행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오히려 이 일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 . -JP VI 6229 (Pap. IX A 216) n.d., 1848

5) JP VI 6205 (Pap. X1 A 171) n.d., 1848

6) 다음을 참고하라. 보충, p. 161(Pap.IX A 171), 그리고 p.163-64(Pap.IX A 215)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나는 기만deception, falsum을 지닌 작가로, 경건한 속임수pious fraud, pia fraus를 지닌 작가로 나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상황은 소위 국가교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상상에 고착되어 그들을 일깨우려면 많은 기술들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로 명성을 얻지 못한 자가 즉각적으로 기독교 작가로 시작한다면,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발언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경계를 하며 말할 것이다. "그건 우리에게 맞지 않아."
나는 심미주의자로 시작했다. 그때 특별히 민첩하게 종교적인 것에 접근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임을 거부했다.
이것이 작가로서 동시대인들에게 스스로를 제시한 방식이다. 어쨌든 이것은 내가 역사에 속한 방식이다. 여기에서 나의 생각은 스스로를 작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나의 개성, 나의 개인적인 삶과 내가 단점이라 고려했던 것은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믿는다. 나는 작가다. 내가 누구이고 나의 재능이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안다. 나의 명분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나는 굴복했다.
나는 특별히 더욱 탁월한 자들에게 매일 보이지 않는 능력에 대한 활용과 능력에 대해 판단을 천천히 하라고 요구한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탁월한 자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판단을 존중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에게 판단을 조심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제시했고, 여전히 제시하고 싶은 것이 기독교다. 나의 매일의 시간이 그랬고, 언제나 그 방향이었다. -JP VI 6205 (Pap. X1 A 171) n.d., 1848

이 세계는 너무 지혜롭다. 종교적인 것을 위해 일하려 하는 자는 비밀리에 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 스스로를 종교적인 자로 행세하면, 세상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천가지 회피와 환상을 갖고 그를 제거한다. 이제 싸움은 더 이상 옛날 같지 않다. 적접적 행동해 적합한 사나운 열정과 싸우는 게 아니다. 아니, 기독교 세계Christendom는 영리함sagacity과 잘 어울린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하더라도, 저 사람의 전체 전략은 이전 시대의 전략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자는 이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소유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불행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은 영리함을 돕기 위해 그의 영리함을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영리함의 도움으로, 그는 단순함으로 회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이해한 방식이다. 내가 특별한 의미에서 감히 스스로를 하나님의 도구라고 일컫는 것 말고는.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증법적인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기 때문이다. 반면,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은 나의 복된 확신이다.
그러나 나의 실존의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나의 죽음 이후에까지 실제로 유능할 수 없다.-Pap.IX A 215 n.d., 1848

7) 다음을 참고하라. JP II 1957; VI 6804 (Pap. IX A 221; X4 A 558)

8) 다음을 참고하라. 보충, p.161, 283-84 (Pap. IX A 171; X6 B 4:3).

p.248-50 (Pap. X3 A 413)

키르케고르의 관점

'Journals and pap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글씨 모음 세 번째  (0) 2020.04.24
손글씨 모음 두 번째  (0) 2020.04.23
If the lily could speak(2)  (0) 2020.02.17
Point of View(관점), Introduction(3)  (0) 2020.02.04
Point of View(관점), Instruction(1)  (0) 2020.01.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