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 비유, 비교, 이 강화에서의 배움에 대한 전체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방식에 대한 준비와 안내로 인도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비교의 근본적인 기반이요, 원형이다. 어떤 모범도 비교 없이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모범과 본받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비교의 개념과 메커니즘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가장 명백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은유, 이미지, 비유 등이 풍부하다는 데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구조적으로 비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비교는 본받음이 본질적 요소다. 결과적으로 비교는 주요한 정신의 운동이다. 우리는 키르케고르에게 본받음이란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는 매 순간마다 나 자신을 그리스도와 관계한다. 나는 제자도를, 곧 본받을 것(imitation, Efterfølgelse)을 맹세한다.(JP, 2:1867)
키르케고르에게서 흥미로운 부분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가 어떻게 본받음에서 이 형상을 “이룰 수” 있는지, 어떻게 이 창조성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이런 “닮음”에서 결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인간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닮은 것이 아니고 역으로 닮았다는 것이다. 이 “역으로”의 닮음, 따라서 역으로의 비교는 키르케고르의 비교와 모범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이 역으로의 비교는 백합과 새의 모범에 수반된 비교의 핵심 열쇠다.1)
비교가 인간의 영역에 다양한 곳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비교는 애매모호하게 남는다. 우리는 비교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하지 않는다.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의 강화는 일반적인 비교의 의미와 관련이 있고, "모범"과 본받음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또한 본받음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이 조건으로 인해 우리는 비교의 부정적 측면을 제거할 수 있고, 오히려 비교를 통해 덕이 세워지는 유익을 누릴 수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글쓰기나 소통의 영역에서 비교의 메커니즘에 관심이 많다. 우리가 이를 논의함에 앞서 이 두 가지 측면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가 비교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비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고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모델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을 때, 비교는 단순히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다양성의 결과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의 한 부분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본다는 것은 결국 비교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교로 인해 다른 사람의 삶을 “보기”도 하고, “존중”하기도 하며, “관심”을 갖기도 한다. 비교 때문에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비교로 인해 어떤 “영감” 받은 행위를 결단할 때, 부적절하게 외적인 방법으로 행한다. 곧, 개인은 다른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의 열등감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는 다른 사람을 본받는 결과를 낳는다.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진실한 본받음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다른 사람의 현실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실존적 상황으로 전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무관심한” 문제다. 개인이 결정적으로 관심을 갖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는 덕을 세우기 위해, 본받기 위해 본질적이면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요점은 자신의 내적인 삶에서 “다른 사람”의 삶으로 초점을 이동하지 않은 채, 비교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본받음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문제는 저자가 외적이면서 공허한 비교가 생기지 않는 모범을 따르도록 어떻게 강화를 구성할지에 대한 것이다. 진정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모범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전달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키르케고르는 무엇보다 성서를 “모방”한다. 성서는 본받음의 언어고, 모범의 언어고, 따라서 뛰어난 비교의 언어다. 그리하여 간접적인 모범, 역으로의 모범을 사용한다.
이 세 개의 강화에서 키르케고르는 성서적 모범과 그의 분석이 새와 백합을 넘어 우리를 스스로에게 돌아오게 하는 성찰적 비교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비교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앞으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이 키르케고르의 간접전달과 관련이 있고 성서의 “부정적” 사용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비교의 애매함을 조사함으로 시작해보자. 무엇보다 비교는 언어와 관련될 때 문제가 생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비교는 그 자체로 언어의 구조 속에 내재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비교와 오해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정립한다. 언어가 모든 오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분명, 비교에 기반을 둔 "모범"의 첫 번째 도전은 "오해"를 피하는 것이다. 오해는 언어를 통해 발생하므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언어를 피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언어를 "극복"하고 침묵을 창조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야 할 오해란 무엇인가? 오해는 어떤 모델을 바탕으로 한 개인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키르케고르에게 비교의 진실한 표현은, 이미 제시되었던 대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스스로와 비교하는 데에 있다. 비교의 가장 큰 올무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아무리 숭고하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 밖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데에 끌리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를 유혹하여 비교의 혼동에 빠지게 한다. 언어는 외재적이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렇다면 "모범"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초월적" 방법은 없을까? 강화는 욥의 친구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침묵silence은 염려worry를 존중하고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염려하는 자를 존중한다. 그들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침묵하며 앉아 있었고 그를 존중했다.2)
키르케고르는 이런 침묵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현존이 욥을 자극하여 스스로를 스스로와 비교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침묵의 현존이 진정한 비교를 위한 조건을 창조했다.3) 침묵이 비교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라면, 새와 백합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완전한 모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현존과 마주한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오해misapprehension, misforstaaelse도 있을 수 없다. 염려하는 자에 대한 배려로 침묵한다.
<들의 백합 공중의 새>의 강화에서 우리가 첫 번째 배우는 것은 침묵이다.4) 이것은 이미 "반전된" 면과 관련이 있다. 그들의 침묵이 기술이 아닐지라도, 새와 백합을 통해 침묵의 기술을 배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새와 백합은 가르칠 수 없는 일종의 침묵을 가르칠 수 있다. 새와 백합이 침묵한 것처럼 우리가 침묵할 때만, 시작부터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5) 침묵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상황context을 제공한다.6)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비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의 강화가 그런 종류의 침묵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언어를 "비워버릴emptying"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고, 언어 안에서 침묵과 "등가물인 것equivalent"을 찾아야 한다. 언어를 이용하는 다른 방법은 키르케고르가 글을 쓰는 독특한 특징이다. 물론, 나는 그의 간접전달, 간접전달의 "부정적 접근," 그것의 일탈적인 이용, 비유사성, 목적론적 중지 혹은 왜곡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윤리적이면서 종교적 선택과 관련된 성공적인 전달을 이루기 위해서(모범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이런 선택들 중의 하나다), 언어의 "순수하면서" "부재한" 특성을 성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전달의 형태와 무엇보다 중요하게 전달자 스스로를 고려하는 것이다.
간접전달은 전달을 이중화하는 전달의 기술일 수 있다. 이 기술은 전달자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자"로 구성하는 데에 있다.7)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자"란 하나님 앞에서 "무"가 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한 바 있다. 우리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이 지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간접전달은 단순히 직접성의 결핍이 아니라 "역으로 된" 언어다. 간접전달은 직접성의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직접성의 불가능성이란 "생성"을 품으려는 언어의 본질적 무능과 관련이 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자신이려 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투명하게 쉴 때," 건덕의 목적이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본받음을 안내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때 전달은 생성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만 하며,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모범"과 "비교"가 건덕을 위해 사용될 때, 거기에는 몇몇 전달자가 있다. 첫 번째 전달자는 백합이다. 혹은 모범을 "제공하는 자"는 다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둘째는 모범을 사용하는 선생의 형태에서는 저자가 존재한다. 따라서 그는 먼저 "부재하거나" "순수한" 전달자인 모범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도 역시 "아무 것도 아닌 자"이거나 전달에서 "부재한 자"이다.
1) 키르케고르는 또한 "역으로의 비교"를 <기독교 강화>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2) 욥기 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3) Ettore Rocca는 "무nothing"가 되는 것과 침묵과의 흥미있는 관계를 만든다. 그는 말한다. "새와 백합은 우리에게 이름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가르친다. 다른 이름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큰 일이든 보잘것없는 일이든 말이다." Ettore Rocca, "Soren Kierkegaard and Silence," in Anthropology and Authority. Essays on Soren Kierkegaard, ed. P. Houe. G. D. Marino, S. H. Rossel (Amsterdam: Rodolpi, 2000), 80.
4) Without Authority, 10.
5) Without Authority, 12.
6) Steven Shakespeare, Kierkegaard, Language and the Reality of God (Aldershot: Ashgate, 2001), 113.
7) Practice in Christianity,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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