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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4강 모범에 대하여(백합을 중심으로)

by 엉클창 2020. 3. 1.

백합에 대하여

백합의 모범이 건덕적인 첫 번째 이유는 백합이 의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교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백합은 순수한 현존으로 거기에 존재한다. 

들의 백합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저 밖을 보라. 하늘의 새가 자유롭게 노니는 저 위를 보라. 거기에는 깨지지 않는 침묵이 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도 현존하지 않는다. 게다가, 만물은 괴로워하는 자를 위한 순전한 설득이다.(본문 중에, UDVS, 161)

백합의 두 번째 "장점"은 물론 언어의 결핍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백합은 말할 수 없다. 그녀가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완전한 침묵이 있고 누구도 현존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염려하는 자가 말을 하고 있다면, 그가 백합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는 조금씩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백합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백합이 아니다. 백합은 말을 할 수 없다.(본문 중에, UDVS, 165) 

백합은 말하지 않음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교에 빠지지 않게 하는 상황을 창조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더 나아가 사람이 스스로를 스스로와 비교할 수 있도록 안내를 받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백합의 모범은 다음과 같다면, "해석불가능한 침묵"이다.

들의 백합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저 밖을 보라. 하늘의 새가 자유롭게 노니는 저 위를 보라. 거기에는 깨지지 않는 침묵이 있다. 거기에는 어떤 사람도 현존하지 않는다. 게다가, 만물은 괴로워하는 자를 위한 순전한 설득이다.
단, 괴로워하는 사람이 실제로 그의 관심을 새와 백합에,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 그 삶을 묵상하는 동안 스스로를 망각하기만 한다면.
반면 그들에게 몰임하는 동안,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언가를 배운다. 아무도 모르게! 왜냐하면 거기에는 순전한 침묵뿐이며 어떤 사람도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려하는 자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백합에 대한 지식을 제외하고 모든 공동의 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백합의 "역할"이 해체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백합은 어떤 위장pretext일 뿐이다. 왜냐하면 백합은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도록 안내하기 때문이다. 모범이 건덕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의 결핍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백합의 순수한 현존이 필요하다. 이 순수한 현존, 순수한 침묵을 묵상함으로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해야 하고, 또한 침묵하게 해야 한다. 

자기를 상실하는 것losing one's self, Selvfortabelse1)과 자기 자신을 얻는 것은 키르케고르에게 동일한 변증법적 운동이다. 키르케고르 작품에는 두 종류의 자기self에 대한 개념이 있다. 이기적 자기selfish self와 이타적 자기selfless self다. 

사람은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자기를 극복하고 순수하면서도 반성적인 자기에 가까워져야 한다. 이 자기가 스스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투명하게 할 수 있는 자기다. "올바르게" 모범을 생각히가 위해, 우리는 모범의 "대상"을 투명한 프리즘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프리즘이 우리의 "자기"를 사로잡고, 자기를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그때 이 프리즘을 통해 스스로를 스스로와 비교함으로 다시 비교를 수단으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안내한다. 

이 모범에 바탕을 두고 있는 키르케고르의 강화와 성서 양자의 경우에서처럼, 모범의 전달의 수준에서, 침묵과 순수한 현존의 청결한 구조에 상응하는 전달의 수단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간접전달을 이용해야 하고, 이에 내재되어 있는 전달자를 제거해야 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우리는 "모범" 자체를 유보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자기self가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도록, 모범은 이를 위한 흔적 혹은 거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시자신이 되는 데에 스스로를 비교한다. 

우리는 이 모범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요구받는다. 자기 자신을 보다는 것은 결국 모범을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이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이 거울은 <자기 시험을 위하여>에서처럼 "말씀의 거울"이다.2) 사람은 이 거울 속에서 진정한 자기를 본다. 이 거울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서이다. 


 

백합을 올바로 보는 관점 중의 하나가 우리를 "간파하도록see through" 한다. 이 관점이 백합의 이런 저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라나는지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정되고," "정지된" 대상 대신, 생성의 운동movement of becoming에 집중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자라나는 식물의 은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데에 구체적concrete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Con-Cresco3)는 자기 자신과 함께 자라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의 강조는 다른 관점으로 주목할 만 하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성서의 면밀한 독해를 통해 어떻게 그의 핵심 개념을 차용했는지를 보여준다. 키르케고르의 작품에서의 유명한 이 "어떻게"는 정확히 성서의 다음 구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나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6:28)

성서에서의 "어떻게"의 강조가 독자들에게 쉽게 간과될 수 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성서의 일반적인 독자가 아니다. 그는 성서의 눈곱만한 부분도 그 부분에 몰입하고 이를 확대한다. 이 경우, 그는 "어떻게"를 강조하고 발전시킨다. 속담이 말하듯, 들풀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없어도 어떻게 자라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들풀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정원사가 희귀한 식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친말하게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이 "어떻게"를 명확히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일종의 "부정적" 절차를 통해서다. 이는 과정 자체인 "어떻게"를 인식하거나 관찰하기보다, 이 과정은 이를 넘어 서서 "눈에 보이지 않게" 돌보는 자를 나타낸다. 왜냐하며 누구도 들의 백합을 돌보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들을 자라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버림받음abandonness"과 백합의 "보잘것없음insignificance"이 건덕을 위해 중용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떻게"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우리는 잘못된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는 사람이 정원사라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더 나아가 "누구도, 누구도, 백합을 돌보는 이가 없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이후에는 새와 관련하여 동일한 측면이 강조된다. 이것은 우리의 상대적 "독립independence"에 대한 것이다. 새와 백합과 대조적으로, 사람은 씨를 뿌려야 하고, 수확을 해야 하며, 창고에 모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양식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것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다른 "정원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를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다. 키르케고르는 독자들에게 이것이 새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스스로를 돕는 자는 하늘의 새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본문 중에, UDVS, 173)

 

 

 

 

 

1)  Selvfortabelse는 몰입absorption과 같지 않다. 오히려 이 단어는 자기를 상실하거나 망각하는 것과 같다.

2)  For Self-Examination and Judge for Yourself!,49.

3) concretion의 어원이다. 이 단어는 어원상, 함께 자라나는 행위 혹은 과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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