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키르케고르가 그의 강화에서 어떻게 이런 "간접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는지 살펴보자. 그가 어떻게 새와 백합의 "부정적" 특징을 살리는지를 살펴보자. 새와 백합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사람이 되는 법, 사람인 것에 행복해지는 법이라고 이 강화는 말한다.
그때, 우리가 이 강화에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를 올바르게 바라봄으로써 염려하는 자가 사람인 것에 만족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음매해보도록 하자.(본문 중에)
"복음이 시인에게 그가 마땅히 새처럼 되어야 한다"1)고 말한다 해도, 우리가 새와 백합에게 배우는 것은 그들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새와 백합의 과업이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는 것인 반면, 사람은 존재해야has to become 한다.2) 이런 반전inversion이 종종 간과된다. 결과적으로, 왜곡되고 공상적인 관점으로 모범을 본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신약의 말씀은 마치 시인이 본받음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시인이 "내가 만일 새가 되면 좋으련만"3)이라고 말할 때처럼,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에게 본받음은 반전이며 변증법적인 것이 분명하다. 모범을 고찰함으로, 모범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본받음이란 다른 사람이 "순수"하여 이 모범을 넘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비유적으로 말해, 이런 "예비적" 모범이 나타내는 "더 고차원적인" 모범은 부정적이거나 반전이다. 우리가 본받기 불가능한 모범을 본받야 하는 한,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수 없음에도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이 모범의 부정정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오해와 모순의 감정에 빠질 뿐만 아니라, 실족의 가능성에 노출된다.
새와 백합의 완전성이 모범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잠정적일provisional 뿐이다.4) 왜냐하면 이 모범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이 모범들보다 우리는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백합을 찬양하면서, 복음은 그녀가 영광 가운데 있는 솔로몬을 능가한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을 닮은 것은 틀림없이 무한히 아름답지 않은가! 백합이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그녀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작은 흔적만 지닐 뿐이다. 백합은 어떤 증거를 갖고 있다. 왜냫면 하나님은 창조된 것들 속에 어떤 증거도 없이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합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본문 중에)
일단 우리가 새와 백합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완전해진다. 우리들의 선생인 새와 백합은 어떤 형상image, Billedet이다.(SKS, 14:155) 따라서 모범을 보는 올바른 관점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키르케고르의 강화에서 이 모범이 어떻게 해체dismantled 되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새와 백합의 모범을 많은 미묘한 주장의 변화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해체한다. 백합이 사람처럼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통해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할 때, 그렇다. 이것이 정확히 <두려움과 떨림>에서의 가공할 만한 이야기의 기능이라는 것은 주의할 만 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 책에서 서술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의 "모범"에서 침묵의 중요성을 기억한다. 또한 이 "침묵"이 그의 모범을 말하기에 필요했다.
결정적인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지라도,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모범일지라도,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지 않기 때문에5) 아브라함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욥의 친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새와 백합과 같은 "순수한 현존pure presence"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백합의 모범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현존은 침묵할 때조차 "무nothing"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도 아무리 침묵한다 해도, 그의 현존이 비교에 의해 결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의말 정도로 거기에 있을 수 없다.(본문 중에)
그는 여기에서 의식과 관련하여 현존에 대하여 말한다. 아이의 예를 든 것이다. 아이는 거기에 존재하나 실제로 완전하게 현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껏해야 아이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아이는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와 닮은 점이 있다. 고난당하는 자가 아이만 있을 때, 아이가 거기에 있지 않는 것처럼 얼마나 자주 감동적으로 느끼고 경험해 왔던가!
우리는 여기에서 현존의 다른 수준이 소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침묵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순수하고," "투명하고," "부재한" 현존의 문제다. 이 현존 덕분으로, 이런 "낯설은" 현존에 빠지지 않고 우리는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다. 이상하게도, 키르케고르는 비교가 "무"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제시한다. 말하자면 빈 공간이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콘텐츠가 없는 공간, 우리를 비교할 만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다.
1) Without Authority, 9.
2) 다음을 참고하라. Christian Discourses, 322. 마찬가지로, "새는 무지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무지해진다."
3) Without Authority, 7.
4) 다음을 참고하라. Steven Shakespeare,Kierkegaard, Language and the Reality of God, 125. "오직 반성에 의해 가능해진 차이에 의해서만, 새와 백합은 우리를 위한 의미를 갖는다."
5)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처럼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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