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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1강 모범에 대하여(새와 백합을 중심으로)

by 엉클창 2020. 2. 27.

한 마디로 말해, 새와 백합은 보잘것없는 모범, 쓸데없는 모범이다. 이 모범의 보잘것없음은 키르케고르의 간접 전달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나는 키르케고르의 강화 역시 간접 전달의 방식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간접 전달은 성서의 이야기의 부정적 혹은 반전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이런 “부정성”이 궁극적으로 본받아야 하는 요구조건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무(nothing)”과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1)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의 강화는 이 모범을 통해 배우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배우는 조건에 대한 문제이며, 특별히 성서를 이해하고 독해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다. 키르케고르의 작품 중에 <들의 백합, 공중의 새>가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모범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말한다. 

나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복음은 나를 죽이려 한다.(WA, 8)

중요한 문제는 본받음의 요구조건을 이해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모범을 어떻게 따를 지에 대한 문제다. 이 문제는 본받음의 문제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비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강화를 다루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수준의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첫 번째로, 새와 배합의 모범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성서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이 모범의 기능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분석을 다룰 것이고, 일반적으로 모범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할지 다룰 것이다. 둘째, 새와 백합의 모범이 어떤 점에서 건덕적일 수 있는지 그 조건에 대해 다룰 것이고, 키르케고르의 글쓰기 전략과 간접 전달의 의미에 대해 다룬다. 

"건덕적" 전달의 조건을 조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키르케고르는 성서에서 주어진 모범의 "건덕적"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각 강화에 확장한다. 따라서 강화의 건덕적인 면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다. 염려하는 자가 새와 백합을 제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는 사람인 것에 만족하는 법을,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사람인 것에 얼마나 복된 행복이 약속되어 있는지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범을 통해 배우는 내용과는 별도로, 키르케고르는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모범을 봄을써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새와 백합을 봄으로써 사람인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모범의 "부정성negativity"과 관련이 있다. "역전된" 혹은 "부정적" 모범과 관련하여, 우리가 어떻게 닮을 수 없는 것을 본받을 수 있도록 요구되느냐는 것이다.2) 예를 들어, 우리는 백합도 닮을 수 없고,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도 닮을 수 없다.3)

"부정성"은 실제로 "유사성 없는disanalogy" 유사성을 통해 표현된다. 혹은 전달자의 비가시성, 보범의 "투명한" 현존, 비교와 건덕의 이탈되고 반전된 특성을 통해 표현된다. 키르케고르는 복음의 본문을 재구성함으로써, 본문을 이탈함으로써, 건덕적 강화에 이 부정성을 집어 넣었다. 새와 백합의 모범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본문을 이탈하여 두 가지의 창작된 이야기의 형태로 본문을 설명한다. 염려하는 백합과 집비둘기와 산비둘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일례로, 우리에게 키르케고르의 저서인 <두려움과 떨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두려움과 떨림> 역시 성서의 원래 본문을 수정하고, 더욱 풍부하게 하고, 더욱 확장한 면이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두려움과 떨림>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면을 갖고 엄청난 규모의 사유를 전달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런 "이탈"이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이중의 간접 전달의 한 부분이다. 먼저 복음의 본문의 조금 더 독자들에게 투명하도록 하기 위해 원래 성서의 본문에서 이탈한다는 점이 그렇고, 또한 이 모범을 넘어 진정한 모범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이끈다는 점에서 그렇다. 

 

 

1) 다음을 참고하라.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여기에서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실존 속에 있는 부정성, 혹은 오히려 실존하고 있는 주체의 부정성(그의 사고가 본질적으로 적당한 형태로 표현해야 하는 것)은 주체의 종합에서, 실존하는 무한한 정신에서, 토대가 된다.”(CUP, 1:82) 혹은 “종교적인 것은 끊임없이 본질적 형태로 부정적인 것을 사용한다.”(CUP 1:524).

2) 이 부분에 대하여는 Sylvia Walsh Utterbac이 말한 바 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긍정적 관계는 부정적이거나 역전된 형태로 표현되고 알려진다. 헤겔의 관점처럼 긍정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부정적인 것에 현존하는 것도 아니고, 암묵적으로 그 속에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것은 생산자가 아니라, 긍정적인 것의 흔적이다." Sylvia Walsh Utterback, "Kierkegaard's Inverse Dialectic," in Kierkegaardiana XI (Copenhagen: C. A. Reitzels, 1980), 38.

3) 키르케고르에게, 백합은 이질적인 면이 었어 우리가 직접적으로 닮을 수 있는 모범이 아니다.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닮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처럼 우리가 그렇게 완전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긍정적인 방법으로 닮을 수 없고 본받을 있는 것은 없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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