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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

제자도를 상실한 교회에서 "새와 백합의 모범"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2)

by 엉클창 2020. 1. 24.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해제>

지난 시간에 이어 설명드립니다. 산상수훈 5장 마지막 절의 결론은 끔찍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처럼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따를 수 있는 모범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복음의 요구조건은 율법보다 더 엄밀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제시한 바를 다 행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등장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모범으로 새와 백합을 말합니다. 새와 백합의 모범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모범이지요. 새와 백합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산상수훈은 부드러워졌습니다. 

이미 책의 해제에서 밝힌 바 있으니,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긍정적인 방향에서 닮을 수가 없습니다. 역으로, 새와 백합처럼 보잘것없는 존재가 됨으로써만 그분을 닮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새와 백합의 모범은 한 마디로 쓸데없는 모범, 보잘것없는 모범입니다. 모범의 시시함, 보잘것없음이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는 결정적 역할을 감당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모범의 부정성(negativity)입니다. 모범의 보잘것없음이 본받는 데에 있어 궁극적으로 요구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앞에서 “무(nothing)”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수 있습니까?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조건이 너무 급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노력과 선행과 공로를 쌓아도 복음의 요구조건을 다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죠. 사람은 모범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에서는 이 문제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렵습니다. 키르케고르는 [권위 없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사이에는 언어의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복음은 나를 죽이려 한다.”(WA, 8)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본받음의 요구조건을 이해하고, 어떻게 모범을 따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부정성”이 우리가 “불가능한” 본받음의 양상을 모범으로서 “예외”의 범주를 생각하도록 안내합니다. 어떤 본받음의 문제이든 간에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이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문제에 관한한 본받음의 변증법적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을 본받는 문제와 관련해서, 새와 백합의 “보잘것없음”은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이것은 부정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가 되는 운동입니다. 긍정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복음의 요구조건은 너무 엄밀해서 긍정적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와 백합처럼 보잘것없는 존재가 됨으로 인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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