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28장 19절 이하를 아실 겁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로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 구절은 헬라어에서는 “제자 삼으라”가 명령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많은데, 제자가 없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과연 제자 아닌 그리스도인이 가능한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그분을 따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이고 그분을 본받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을 따를 수 있는 것인지.
산상수훈은 치명적입니다. 율법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제시합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마5:17)
율법은 살인자를 죄인이라 하지만 복음은 마음으로 미워해도 살인자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간음하면 죄인이라 하지만 복음은 마음으로 간음해도 이미 간음했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더 잔인합니까? 율법이 잔인합니까, 복음이 잔인합니까?
무엇이 더 어렵습니까? 율법이 어렵습니까, 복음이 어럽습니까?
어째서 복음이 좋은 소식입니까?
마태복음 5장 마지막절은 더 충격적입니다. 5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온전”을 “완전”으로 바꾸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처럼 너희가 퍼펙트(perfect)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도대체 누가 이 엄밀한 윤리적 잣대에서 퍼펙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6장에서 새와 백합의 모범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모범입니다. 왜, 도대체 왜 이 모범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요?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를 독해하실 때는 바로 이 지점을 생각하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한 해제를 올리겠습니다.
힌트. 새와 백합의 모범은 "보잘것없는" 모범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잉여"고 "여분"에 불과한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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