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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184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사람인 것에 만족하기, 영상과 함께 소개합니다. 간단하게 "비교"에 대해서만 다룹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2020. 2. 4.
투명성(Transparency, Gjennemsigtighed) 투명성이란 개념은 에서 구체화된다. 이 말은 가명의 저자 안티 클리마쿠스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절망이 완전히 제거될 때, 자기self의 상태를 나타내는 공식은 이렇다: 자신과 자신을 관계하면서 자기이려 할 때, 자기는 자기를 정립하는 힘에서 투명하게 gjennemsigtigt안식한다.1) 이와 같은 표현은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2) 투명성에 대한 해석은 이 책의 2부에서 더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투명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런 점에서 죄에 대한 개념도 재정립된다. 안티 클리마쿠스에 의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이방인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3)그래서 2부의 시작을 죄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거나 하나님 개념과 함께 있다고 말한 이유다. 어쩌.. 2020. 2. 2.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Gud er Aand, er usynlig, og Usynlighedens Billede er ... Usynlighed 이 부분은 요한복음 4:7-26절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 복음 4장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예배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아마도 이 지점을 생각하고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배경을 보면, 우물가에 왔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다. 여인은 여기에서 대화하다가 예수님을 "선지자"라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너희는 알지 못하.. 2020. 1. 31.
비인간적인 비교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 비인간적인 비교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 The person who turned his back on inhuman comparisons Den, der vendte de umenneskelige Sammenligninger Ryggen 이 표현은 키르케고르의 "투명성transparency"과 관련이 있다. 복음은 비교를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인간은 비교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올바른 비교를 추천한다. 인간 세계에서는 서로의 다양성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비교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복음은 올바른 비교를 하기 위해서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가 있는 곳을 추천한다. 새와 백합.. 2020. 1. 31.
권위에 대하여 권위Authority, Myndighed 키르케고르는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작은 책은 저자가 설교할 권위가 없으므로 설교라 하지 않고 강화권위discourse, Taler라 한다. 또한 화자는 교사일 필요가 없으므로 '건덕적 강화'이지 덕을 세우기 위한 강화가 아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한 국가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국교회에 의한 자격 부여, 곧 안수Ordination를 받지 않았다. 이후 모두 87개의 강화를 자기의 실명으로 출판했지만, 끝까지 설교자가 아닌, 강화자로 남았다. 1847년의 기록물에 의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위는 왕이 되는 것을, 황제나 장군이 되는 것을, 무력을 갖는 것을, 사제가 되는 것을, 경찰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확고하고 의식적.. 2020. 1. 30.
04 사람인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이북 소개) 염려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나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일은 은혜이며 하나님을 닮은 방식이다. 새는 일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닮는다. 키르케고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한다는 것은 사람의 완전성이다. 일함으로써, 사람은 또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닮는다. 사람이 그의 음식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어리석게 그가 자기 자신을 돕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더 좋아 한다. “그는 자신의 음식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새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니다. 충분히 확실하게 새는.. 2020.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