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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06 어떻게 하나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가?

by 엉클창 2019. 7. 25.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죄가 허다합니다. 전 세계에 75억 명 이상이 살고 있고 이 사람들이 짓는 죄를 다 세기도 전에 새로운 죄는 계속해서 탄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IT기술이 발전을 한다 하더라도 이 모든 죄를 다 세기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 생겨나니까요.

문제는 이겁니다. 죄가 이렇게 생성될 때, 콩깍지가 씐 사랑 역시 군대를 조직하여 이 죄에 맞서 싸운다면 싸움이 가능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당장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 안에 콩깍지가 씐 사랑이 있는지를. 세상을 보십시오. 이 사랑의 군대가 그렇게 많은가를. 안타깝게도 이 사랑의 군대는 그렇게 육박전을 벌이며 싸울 만큼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콩깍지가 씐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을까요? 이번 시간에는 우리가 이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옛날 이교도 시대에, 현자로 알려졌고 찬양받았던 늙은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비아스(Bias)였습니다([그리스철학자열전], 55). 그는 사악한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배가 항해 중에 조난당했을 때, 사악한 자가 고개를 들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현자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조용히 하게, 자네! 자네가 배에 타고 있는 것을 하늘이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배는 뒤집히고 말 걸세.”

, 그럼 생각해 봅시다. 현자의 말에 의하면, 배에 탄 죄인이 죄 없는 자를 파멸시킨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까? 배에 탄 죄인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다 죽어야 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자 한 사람으로 인해 희생되고 있습니까? 테러도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테러로 말미암아 수많은 선량한 시민이 희생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맞지 않을까요? 아마도 이것을 믿을 만한 용기가 부족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비참함을 발견할 만큼 충분히 영리한 반면, 사랑의 힘을 깨달을 만한 마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암울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결국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은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겁쟁이로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콩깍지가 씐 사랑은 우리에게 한이 없는 용기를 줍니다. 이것이 모든 사도가 담대한 확신을 갖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다음 성경구절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사도행전 9:27-9, 13:46, 18:26, 19:8, 26:26, 28:31, 에베소서 6:19, 데살로니가전서 2:2입니다.

이제 우리는 콩깍지가 씐 사랑의 역사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 같은 배에 사악한 사람 대신 경건한 자인 한 사도가 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이방인의 배가 그레데를 떠나 로마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물론 이 배는 죄수들이 가득 찬 배였습니다. 그때 항해하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많은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었던 한 사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나아와 배에 타고 있었던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겁니다.”(27:22)

사악함은 콩깍지기 씐 사랑보다 더 큰 힘이 있을까요? 배에 사악한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바꿀 수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는 그런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환난의 날을 감하실 것을 선포하지 않았나요?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22)

오히려 사도 한 사람으로 인해 이 배에 탄 모든 죄수들이 구원받은 것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콩깍지가 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한다면, 부적합한 생각입니까? 아직도 사랑의 군대가 허다한 죄만큼이나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요? 저는 콩깍지가 씐 사랑을 과장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사도가 말한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하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5:16)

그러면 이번에는 의인의 기도가 얼마나 역사하는 힘이 큰지, 콩깍지가 씐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긴급하게 말하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탄원할 때, 그는 허다한 죄를 덮지 못했습니까?(18:22-23) 아니면, 그가 탄원함으로 허다한 죄가 더욱 증가되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심판을 확정지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이미 심판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심판을 확정짓기 위해 기도했습니까?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해봅시다. 말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과정 속에 주님을 끌어들인 것은 아닙니까? 그가 수를 센 것은 죄인의 숫자였습니까, 의인의 숫자였습니까? 그는 주께서 허다한 죄를 잊도록 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센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은 그저 느낌을 뿐입니다만.

이를 테면, 50, 45, 40, 30, 20, 그래, 10명의 의인만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허다한 죄를 덮은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도시의 붕괴는 그 반대를 증명한 것입니까? 혹은 소돔에는 겨우 10명의 의인도 없다는 것 말고 증명한 것이 없습니까? 무엇으로 아브라함과 사도를 비교했습니까? 무엇으로 그의 담대한 확신을 사도의 확신과 비교했습니까? 아직도 둘 다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살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인간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사람이 의롭다면, 심지어 천사도 심판합니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3)

 

그러나 허다한 죄를 덮는 콩깍지가 씐 사랑은 더욱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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