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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04 사랑은 어떻게 눈이 머는가?

by 엉클창 2019. 7. 24.

이제 불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허다한 죄를 덮는 완전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 연약합니다. 누군가의 허다한 죄를 덮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이 사랑은 얼마나 고귀합니까?

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은 우리 눈을 멀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사랑하는 자의 불완전성이나 그에게 있는 원래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의 영혼 속에 머물 때만, 오직 그 때만 눈이 머니까요. 그때만, 사랑이 그 안에서 승리를 거둘 때에만 그는 점점 더 눈이 머니까요.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거꾸로 말합니다. 사랑의 불완전성을 설명할 때만 눈이 먼다고 말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애인이 눈이 멀어, 눈에 콩깍지가 쓰여 상대의 단점, 상대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뭐라 말합니까?

, 그 애 사기꾼이야.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넌 무언가에 홀렸다고! 정신 차려!

하지만 오늘 세상의 관점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벗겨져서 문제이지,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영원히 눈에 콩깍지가 씐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에 사랑이 허물을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봤음에도 보기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을 속인 후, 마침내 더 이상 죄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이것은 사랑이 더욱 불완전하게 된 것일까요? 누가 더 잘 숨길까요? 숨겼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까, 숨겼다는 것을 까먹은 사람입니까? 말씀은 선포합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1:15)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이 깨끗한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만 보인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깨끗한 자에게 점진적으로 사라져가는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깨끗한 자가 더욱 깨끗할수록, 그에게 모든 것은 더욱 깨끗해지죠. 혹은 깨끗한 자가 알았던 것을 알기를 거부함으로써 더러워지지 않도록 먼저 자신을 보호한 후, 마침내 더 이상 더러운 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것이죠. 그럼 이것은 깨끗한 자의 불완전성인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보느냐는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관찰은 수용 혹은 발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산의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겉으로는 보는 것은 현상이지만 마음에서는 생산되는 것이죠.

교회에 한 청년을 전도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전도할 때, 예쁜 학생들 많다고 한 겁니다. 그냥 그 소리 듣고 교회 따라왔다 칩니다. 전도한 청년은 예배에 집중하면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문한 청년은 예쁜 여학생만 보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듭니까? 마음의 문제이지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보고 있죠. 결국 관점이 생산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생산의 문제인 한, 결정적인 것은 보는 자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동일한 것을 보면서, 한 사람은 한 가지를 보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그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숨긴 것을 발견합니다. 보고 있는 대상이 외적인 세상에 속해 있는 한, 보는 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아마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관찰에 필요한 것은 그의 내적 본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관찰의 대상이 영적인 세계일수록, 그의 내적 본질이 어떤 상태냐는 것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때, 차이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겁니다. 그때, 사람을 불결하게 하는 모든 것, 그의 관찰을 불결하게 하는 모든 것은 안으로부터 나옵니다. 외적인 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내면의 눈이 있는 것이죠.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3)

이 말씀에 의하면, 사악한 눈은 안으로부터 나옵니다. 사악한 눈은 사랑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눈은 심지어 여호와께서 선하실 때조차 불의하게 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나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네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5)

세상에, 악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도 악을 발견합니다! (evil)이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죄를 봅니다. 그러나 청결(purity)이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하나님의 손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5:8)

그러나 마음이 악한 자,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요한311)

따라서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가 숨기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입니다. 마음에 죄의 욕망이 거할 때, 그 눈은 죄의 허다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훨씬 더욱 크고 다양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까요. 그러나 사람 속에 있는 등불이 어둡다면, 어두움은 얼마나 크겠습니까!(6:22-23)

죄의 염려가 마음에 거할 때, 그 귀는 죄의 허다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훨씬 더욱 크고 다양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눈이 머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눈을 감고도 그의 사악한 귀로 듣기 때문입니다.(집회서 19:26-27)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닫히고 공개적으로 저지른 죄조차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숨겨진 죄를 발견하겠습니까!

눈짓하는 자는 마음에 악이 있다.”(10:10)

그러나 눈짓을 이해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그 귀는 닫히고 세상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하물며 쓰라린 조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의 형제에게 , 이 바보야(라가)”라고 말하는 자는 공회 앞에서 죄인취급 당할 거니까요.(5:22) 그러나 그것을 말할 때, 듣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성급함이 마음에 거할 때, 그런 사람은 죄의 허다함을 발견하기에 빠릅니다. 그때 그는 불과 반쯤 말한 것도 기막히게 이해합니다. 먼 거리에서도 거의 발음조차 하지 않은 말을 빠르게 파악합니다.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그런 사람은 천천히 이해합니다. 빠른 말은 듣지도 못 하는데 하물며 그 말을 반복할 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 말에 좋은 자리를 배정하고 좋은 의미를 부여하니까요. 그는 분노로 가득 찬 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모욕으로 가득 찬 조롱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분노와 모욕으로 가득 찬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을 더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색함이 마음에 거할 때, 그런 사람은 한 눈으로 주고 보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일곱 눈으로 봅니다.(집회서 20:14) 그런 사람은 쉽게 허다한 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결코 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줄 때, 그 눈은 선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질투가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청결한 자에게서조차 불결한 것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그 눈은 불결한 자에게서도 선을 발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눈은 불결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청결한 것을 봅니다. 이 눈은 청결한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발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악으로 바꾸는 세상의 힘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악을 선으로 바꾸는 위로부터 오는 힘도 존재합니다. 바로 이것이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미움이 마음에 거할 때, 죄는 바로 사람의 문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4:7) 죄의 다양한 욕망이 그에게 현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음에 거할 때, 죄는 멀리 도망가고 그 사람은 그것을 힐끗 볼 수도 없습니다.

싸움, 질투, 분노, 갈등, 불성실과 당파가 마음에 거할 때(5:20), 그런 사람은 허다한 죄를 발견하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있을까요? 혹은 허다한 죄를 마들기 위해 오래 살 필요가 있을까요?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가 마음에 거할 때(5:22-23), 그런 사람이 허다한 죄의 한 복판에 서 있을지라도, 나그네처럼, 외인처럼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그 나라의 관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에게 어떤 설명이 요구된다면, 얼마나 많은 허다한 죄가 덮어집니까!

혹은 이런 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영리하게 말해야 하나요? , 세상에서 허다한 죄는 존재하고 있고 사랑이 그것을 발견하든 못하든 여전히 크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말씀과 그 말씀이 서술하고 있는 사랑은 철저한 검사에 합격할 수 없는 우아한 미사여구로 남겨놓아야 하는 건가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저 영리함은 허다한 죄를 이해한 것만큼이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혹은 영리함은 그 반대를 인정합니까? , 허다한 죄는 이해가 그것을 발견하든 못하든, 여전히 크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영리함은 숨겨진 죄를 추적하고 발견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교활함에 만족해하지 않았나요? 그때 이해가 허다한 죄를 발견하는 것이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나 동일하게 진실합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제 삼의 길은 있습니까? 이해를 통해 죄에 대하여 아는 것, 사랑스럽게 죄에 대하여 무지해지는 것을 제외한 방식이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 지식은 비인간적인 지식이 아닌가요? 그때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떤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사랑의 힘입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랑처럼 대단한 업적이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조용한 기적 속에서 더욱 위대합니다.

모든 것이 보기에 심히 좋을 때, 모든 완전성 속에 있는 세상을 본 자는 행복하다.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영광에 증인이 된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동역자 된 영혼은 더욱 복이 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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