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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02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by 엉클창 2019. 7. 19.

다윗이 얼마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복수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든 사람들, 복수 시편 한 번 읊어봅시다. 35, 55, 58, 59, 60, 70, 109, 137, 140편입니다. 저주까지 나오는 구절이 있으니, 확실히 저주까지 해봅시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원수는 역시 자기 집안 식구인가 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요, 집안 식구가 나를 못살게 합니다. 그때마다 새벽에 나가 복수의 기도를 올려봅시다. 하나님의 복수의 힘을 믿고 하나님께 복수를 부탁해봅시다. 아마 이때, 특히 시편 55편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2 나를 모욕한 사람이 나의 원수였다면, 차라리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보다 잘났다고 스스로 추켜세우며 우쭐되는 사람이 나의 대적이었다면, 차라리 나는 그들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13 그런데 그런 자가 바로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가까운 벗이라니!

14 나와 함께 다정스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손잡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니!

15 죽음아, 나의 적들을 순식간에 내리 덮쳐라. 사악함이 그들의 집과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들을 산채로 무덤으로 데려가거라!”

어떻게 속이 조금은 시원하십니까? 확실한 말씀 하나 더 소개하지요. 바로 하나님의 복수가 얼마나 끔찍한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말씀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복수하는 것은 나의 일이다. 내가 반드시 복수하리니, 때가 되면 그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리라. 재앙의 날이 가까웠으니, 멸망이 그들을 덮치리라.”(신32:35)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라.’”(롬12:19)

하나님의 복수는 더욱 강력합니다. 인간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를 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복수는 미워하는 자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벌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에게 죄를 짓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삼대,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출20:5)

그렇다면, 다윗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한가요? 여러분의 복수의 기도는 정당합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여기에서는 거름보다 더 심한 악취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복수보다 더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상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는 다르게 그의 사랑은 변화와 변조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원수를 미워하는 방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겨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가 복수를 여호와께 남겨 놓았을지라도, 왜냐하면 복수는 그분께 속한 것이니까, 그는 복수의 달콤함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까 속이 시원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수의 약속은 꿀보다 더 달콤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복수는 인간의 미약한 복수보다도 훨씬 더욱 두렵다는 것을 아는 것은 더욱 달콤하고 시원한 청량음료 같습니다.

인간은 그의 원수를 저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경건치 않는 자와 그의 후손들을 자자손손 저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인간의 어떤 복수도 하나님의 복수만큼 끔찍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하나님께 복수의 기도를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수는 훨씬 더 달콤하니까요. 우리는 약합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복수할 만한 힘과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복수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복수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다윗의 기도를 인용하면서 당신의 원수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도의 순간에 당신의 원수를 묵상하며 당신의 원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이 죄를 덮는다고 말할 때에, 당신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죄를 덮었습니까? 아무리 복수의 기도가 시원하고, 아무리 복수의 기도가 달콤하다 해도, 아무리 하나님의 복수가 어떤 복수보다 통쾌하다 해도, 이 기도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을 잠재울 수는 없습니다.

그때, 사랑이 가장 태평한 순간에도 복수의 불안은 항상 한쪽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런 식으로 외눈박이가 되기 원하는 것입니까?

물론, 당신은 두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기 보다는 원수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눈이 사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한쪽 눈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한쪽 눈으로는 원수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거의 꿈을 꾸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분노는 앉아서 조용하게 받았던 것과 주었던 것, 내 것과 네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주고도 자신이 준 것을 모릅니다. 아니,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주고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준 것을 계산 하고 있고 내 것과 네 것을 따지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분노의 종입니까? 물론, 누구든지 순교의 길은 열려있습니다. 사랑의 순교자가 될 것인가, 분노의 순교자가 될 것인가의 차이이지요.

그때, 어떤 사랑도 마지막 시간이 올 때까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지막 때만이 사람은 사랑의 불확실한 요구가 충족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행복을 찾는 사람입니까? 당신의 사랑은 어떻게 허다한 죄를 숨길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이 변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입니다. 본질과 다른 것으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오직 단 하나의 것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줍니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요구하기 위해 남겨진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결국, 잃어버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저주받을 때, 축복하고 또 축복합니다. 사랑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원수도 또한 사랑의 이웃입니다.(마5:44) 그때 사랑은 복수를 여호와께 남겨 놓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분께서 여전히 원수에게 더 큰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은 원수 갚음을 위해, 복수하기 위해, 죄를 덮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목사로서 나는 원수를 사랑할 힘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수를 남겨 놓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에게는 너무 힘듭니다. 복수의 금지된 달콤함이 여전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소서!

베드로가 이 사랑을 여러 번 증명했듯이, 또한 그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할 때에 이 사랑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이 어떻게 허다한 죄를 덮고 숨기는지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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