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발견”은 대단한 일입니다.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 예들 들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미생물학자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작은 세계를 발견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 뿐입니까? 저 우주에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행성을 발견한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발견하는 일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발견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혹은 “악”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 초년생으로 처음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 젊은이가 세상이 얼마나 선한지, 선한 부분만 찾아서 헤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아마도 사람들은 이 젊은이에게 말할 것입니다.
“자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인생 조금만 더 살아봐. 자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조만간 이 직장에서 알게 될 걸.”
세상에서 선한 부분만 찾아서 헤맨 사람을, 선한 부분을 발견한 사람을 마치 애송이, 촌뜨기 취급합니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으로 처음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가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와, 이 친구 대단한 걸.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촌뜨기인 줄 알았는데, 전문가야.”
여러분도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회는 악의 발견에 대해 더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악에 대하여는 맹인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이 사랑이 사랑받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콩깍지가 씐 사랑의 특징은 선한 부분만 볼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이 세상의 눈에는 이 사랑이 애송이, 촌뜨기일 뿐이지요.
이 세상에서 “허다한 죄”를 발견하는 일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허다한 죄를 발견하는 일에 맹인이 되어버린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멍청이로 취급받는 것이 굉장히 싫습니다. 그래서 콩깍지가 씐 사랑을 불완전한 사랑으로 취급하고 갖다 버리려 하는 것이지요.
애송이, 시골촌뜨기 취급하는 데에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악에 대하여 가장 먼저 알리는 일을 참 대단한 일로 생각했던 겁니다. 사회의 온갖 불법과 불의를 폭로하는 일을 마치 사명으로 알고 목숨 걸고 싸웠던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어떤 잘못이나 불의를 눈감아주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악”에게 어떻게 저항하느냐의 문제인 겁니다. 우리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요.
역으로, 사람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선한지를 발견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선한 것을 발명했다고 기뻐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계속 그런 식으로 세상의 좋은 면만 발견하고 다닌다면 그런 발견으로 더욱 능멸을 받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이런 사람은 대우 받습니다. 가장 순수한 사람, 가장 선한 사람, 가장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는 사람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것!
요즘 교회에 넘쳐나는 악이 있답니다. 세상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것도 교회에서, “교회”라는 거룩한 곳에서 넘쳐나는 악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게다가,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끼리 경쟁적으로 그런 악을 발견하는 일을 부추깁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기뻐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것이지요. 교회가 “자멸”하는 겁니다.
결국 어떤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악을 발견하는 일을 설교하면 설교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듭니다. 따라서 악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교활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선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악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애송이, 촌뜨기가 되는 길입니다. 혹은 경험이 없는 사회 초년생일 뿐이지요. 다시 말해, 악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는 것은 죄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입증하는 거니까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악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폭로하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애송이, 촌뜨기”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겁니다. 물론, 모든 것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세상의 악을 대중들에게 폭로하는 것을 좋아하고 속으로는 그런 것을 즐깁니다. 특히, 교회 안에 악을 폭로하는 일은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없지요. 세상의 악은 별로 재미없습니다.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는 교회,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는 목사, 가장 선하다고 자부하는 어느 곳이든 그 곳에 스며든 악을 폭로하는 일은 가장 즐겁고 재미난 일입니다.
자, 보십시오. 하지만 이렇게 악을 다 폭로했던 사람, 이 사람이 홀로 있을 때는 어떨까요? 이 사람이 홀로 있을 때에도 세상에 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을까요? 그래도 교회에 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을까요? 하지만 대중 앞에서, 직장에서, 동료들과 있을 때, 이럴 때는 세상에 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두 명의 악당이 있어 함께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목격자가 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음모를 꾸미는 현장에 제 삼자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기로는 이 제 삼자는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요. 저 악당들이 보기에, 제 삼자는 첫사랑의 행복 속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악당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것은 괜찮아.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들은 아마도 씩 웃으면서 그 사실을 말했을 것입니다. 이 웃음으로 그들의 영리함에 존경을 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에 빠진 자에 대해 여전히 모종의 존경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 사랑하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가 비웃음을 당하든, 조롱을 당하든, 그가 동정을 받든, 사상이 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든 간에, 확실한 사실은 허다한 죄와 관련하여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마치 눈에 콩깍지가 씐 것과 같군요. 심지어는 비웃음도, 조롱도, 동정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즉,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의도적인 노력으로 찾으려 하는 발견과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봄”과 “들음”을 구별합니다. 영어에서 “지각동사”에 해당하지요. 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싫어도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런 점에서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비웃음을 당하든 그렇지 않든, 그가 조롱을 당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리는 그를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에 완전히 몰입되고 사랑 속에서 안식하면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악당은 그와 같은 사랑을 경험하기를 열망했는지도, 그와 같은 사랑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콩깍지가 씐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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