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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09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십시오

by 엉클창 2019. 7. 31.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발견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는 허다한 죄를 숨깁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콩깍지가 씐 사랑은 바울 사도가 말한 어린 아이가 되라는 명령을 표현합니다. 저 세상을 나가 보십시오. 실제로 세상에서 현명하다고 칭찬받는 것은 악에 대한 지식입니다. 반면에 이 지혜는 선에 관한 지식입니다.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악에 대한 지식이 없을 뿐더러 그런 지식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사랑은 어린 아이이고 어린 아이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랑은 어린 아이이기 원하고 어린 아이로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아이를 도둑의 소굴에 데리고 가보십시오. 그러나 아이가 거기에 너무 오래 있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타락하게 되니까요.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아이가 도둑의 소굴을 경험하도록 해봅시다. 그런 후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가 경험한 모든 것을 말하도록 시켜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아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놀랄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잔뜩 물건을 들고 왔어요. 그러더니 서로 그 물건을 나누어 가지며 좋아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음에는 어떤 곳에 가서 무엇을 가져올지 상의하는 것 같았어요.

아이는 선한 관찰자입니다. 아이는 모든 아이가 그런 것처럼 탁월한 기억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는 가장 세부적인 것조차도 빠짐없이 모든 것들을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생략되어 있어, 그 아이가 도둑의 소굴에 갔다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아이가 어디를 갔다 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만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이가 생략하고 있는 설명은 무엇일까요? 혹은 아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입니다. 아이의 설명에서는 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정확합니다. 그때 아이는 무엇이 결핍되었습니까? 도대체 아이의 이야기가 그렇게 자주 어른들을 가장 심오하게 조롱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에 대한 지식입니다. 아이는 악의 지식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심지어 악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해”라고 하는 지점을 면밀해 고찰해봅시다. 무엇보다 모든 이해의 바탕에는 이해해야 하는 사람과 이해시켜야 하는 사람 사이에 “이해”가 놓여 있습니다. 이해는 이 사이에서 형성되니까요. 

따라서 악에 대한 지식은 그 지식이 아무리 순수할지라도, 그것은 악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아무리 악에 대한 순수한 이해가 있다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악에 대한 서로의 이해일 뿐입니다. 이런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악을 이해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악에 대한 지식을 경멸했을 것이고 그 지식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에 대한 이해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험천만한 호기심일 뿐입니다. 아니면 그것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변명을 찾기 위한 교활한 정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이 만연한 것을 보면서 자신의 실수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비교를 통해 변명거리를 찾게 됩니다. 

또한, 악에 대한 이해는 다른 사람의 타락을 알아냄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 하는 기만적 계획입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이 악에게 작은 손가락 하나를 주면, 악은 곧 손 전체를 요구할 것이고 그때 변명은 모든 것들 중에서 저축해야 할 가장 위험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악함과 비교함으로써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더 좋아지기 위한 사악한 방법입니다. 

비교를 통해 악에 대한 지식이 들어오면 얼마나 허다한 죄를 발견하겠습니까? 하지만 악에 대한 이해를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죄를 숨깁니까? 

황달을 앓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듯이, 같은 방식으로 악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점점 더 깊이 악에 빠질수록, 허다한 죄를 발견하게 되고 그의 주위에서 허다한 죄는 점점 더 우글거리게 됩니다. 그의 눈은 예리해지고 더욱 무장을 합니다. 곧 전쟁이라도 치룰 태세입니다. 아! 그러나 진리에 관해서가 아니라 비진리에 관해서 그렇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야는 점점 더 편견을 갖게 됩니다. 그의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다가 결국은 악에 오염되어 모든 것 속에 있는 악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가장 순수한 곳에서조차 불순함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일종의 위로가 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각입니까! 왜냐하면 될 수 있으면 무한한 죄의 허다함을 발견하는 일은 그에게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조차 죄가 얼마나 허다한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의 사명이 됩니다. 자, 이제 그는 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조차 죄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중상모략, 명예훼손과 거짓말의 도움을 받아 죄를 발견합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런 도움을 받아 실천하다가 결국은 진실로 그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허다한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콩깍지가 씐 사랑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 사랑이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음으로써 허다한 죄를 덮을 때, 무한히 진지하지만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은 무엇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놀이를 생각나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실로 우리가 어린이들과 노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집에 어린 쌍둥이 딸이 있습니다. 숨바꼭질을 한다고 숨으라고 하면 뻔히 다 보이는 곳에 숨습니다. 이미 어디에 숨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그때 말합니다.

어디에 숨었을까? 어디 있는지 잘 안 보이네?

우리가 어린 아이와 놀 때, 우리 앞에 바로 서 있을지라도 보지 않는 경우가 있고 아이도 우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에게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줍니다. 놀이에서처럼 아이다움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눈을 뜬 채로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때, 진지함이란 그가 볼 수 없는 것이 악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미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정신 이상”을 뜻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어떤 종류의 일에 지나칠 정도로 열중한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콩깍지가 씐 사랑은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진실로 미친 사람과 같습니다. 

고대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광기에 대해서 엄격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파이드로스에 보면, 병적인 광기와 신적인 광기로 구분하면서 그 중에서 최선이 광기는 “사랑의 광기”라고 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미쳤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질병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적인 광기입니다. 이교도의 용어인 “신적인”이라는 말을 빌려 쓰면, 이것은 바로 앞에 벌어지고 있는 악을 볼 수 없는 일종의 신적인 광기입니다. 

"사랑에 미치다"

사실 악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갖고 있는 이런 현명한 시대에는 이런 신적인 광기, 이런 사랑의 광기를 존경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어, 선에 대한 이해는

갖고 있으나 전혀 악에 대한 이해를 갖기 원하지 않는 콩깍지가 씐 사랑은 미친 사람과 닮았고 미친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가장 좋은 예를 들어 봅시다. 예루살렘의 의회 앞에 끌려간 순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난 군중들을 상상해보십시오. 또한 고위 관직자들에 의해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얼마나 많은 시선들이 그를 향했고, 그를 겨냥하고 있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 많은 시선들은 단지 주님이 그쪽 방향을 쳐다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시선이 그리스도에게 조롱, 경멸, 동정, 조소를 전달해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스럽게 허다한 죄를 덮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조롱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모욕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조소가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욕설이 쏟아져 나왔습니까!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지도록 전달하는 것은 무엇보다 긴급했습니다. 그는 태만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히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니까요. 어찌 성난 군중들 틈에서 이 중요한 과제 앞에서 태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진리의 도구인 것처럼, 군중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이 순진한 사람을 조롱하고 상처 입히고 학대하는 도구인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그분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스럽게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음으로써 허다한 모든 죄를 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을 때, 이런 식으로 허다한 죄를 덮을 때, 우리가 부끄럽지 않는 제자로서 “버림받고, 조롱을 당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 이 모든 것을 그분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분은 조롱과 동정 사이를 걸었습니다. 그분은 조소와 고통의 울부짖음 사이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스럽게 아무 것도 발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 사람이 극렬이 타는 풀무에 떨어질 때 불이 능히 그 사람들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던 것보다 더욱 놀랍습니다.(단3:21-30) 만약 조소를 당하는 우리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조롱과 조소는 실제로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격분함으로써만, 허다한 죄를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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