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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11 관대한 해석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다

by 엉클창 2019. 8. 7.

예전에 제주도 올레길 살인사건 기사가 생각이 난다. 그 뉴스 기사에 따르면, 살인자의 어머니는 그 아이는 평생 나를 위해 살아왔다며 범행 사실을 믿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심지어는 이웃 주민들도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15년 전쯤 원양어선을 타면서 고생해 번 돈을 내 암 수술비에 다 쓰려하기에

말렸더니 돌아가시더라도 수술은 해보고 돌아가셔야 한다며 나를 수술시켜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줬다며 눈물을 훔쳤다고 전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 살인자의 엄마가 감옥에 갇힌 아들을 찾아간다. 아들 면회를 요청하고 아들을 만나며 말한다.

우리 아들은 그런 아들 아녀. 절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모든 사람이 아들을 정죄해도, 모든 사람이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해도, 그래서 심지어는 감옥에 갇힌 상황에도, 유일하게 아들을 낳은 엄마가 이 사실을 부인하며 끝까지 아들을 믿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바로 이것이 콩깍지가 씐 사랑이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관대한 해석을 한다. 누구보다 관대한 해석을. 심지어는 아들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들이 얼마나 선하고 착한 사람인지를 변호한다.

사냥꾼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 사냥을 배운 사람은 서투르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날마다 해를 더해 가면서 사냥의 기술은 증가한다. 이제 어언 10년이 넘게 흘러 사냥에 베테랑이 된다. 그는 이제 동물의 발자국만 보아도 대략 이 동물이 무엇이고 어디로 이동했는지 추적이 가능하다. 약간의 움직임과 소리만 들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안다.

이제 그가 스스로 터득한 기술은 누구에게도 책으로 전달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말로 전수할 수 없는 느낌과 경험으로 배운 지혜다. 그는 덫을 어디에다 놓아야 할지, 어느 지점부터 추적을 해야 할지 느낌으로 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사람에게 적용시켜 보자.

이걸 다른 식으로 접목시켜 보면, 범죄자를 발견해야 하고 추적해야 하는 형사를 생각나게 한다. 베테랑 형사, 우리는 범죄자를 기막히게 발견하고 추적하는 이 베테랑 형사의 지식에 놀란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간파한다. 범죄자들이 아무리 많은 구실과 핑계를 만들고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도, 모든 것을 다 파헤칠 만큼 훌륭하다.

요즘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범죄자를 다 추적한다 해도, 이 형사의 감만큼 따라오기란 불가능하다. 이 형사는 단 하나의 약간의 실마리로도, 범죄자가 무심결에 흘리고 간 머리카락만으로도 그의 존재를 추적할 수 있다. 심지어 그가 신은 운동화 자국으로도 추적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베타랑 형사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기술에 찬양한다.

,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상해보자. 마지막 재판이 있는 날이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기소되어 판사 앞에 선다. 하지만 우리는 판사도, 형사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사랑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대한 해석의 도움으로 허다한 죄를 덮기 위해 재판의 현장에 간다. 그런 콩깍지가 씐 사랑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대단한 능력자다. 가장 관대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자다.

그로 인해 모든 판사들, 형사들, 검사들도 그의 능력을 부러워한다. 관대한 해석의 도움으로 허다한 죄를 덮는 해석의 예술! 콩깍지가 씐 사랑은 이런 해석의 예술을 실행하기 위한 사도다. 그가 얼마나 살인자의 편에서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 선한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가 보라! 판사도, 형사도, 검사도,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던 살인자의 선한 면들을 발견하고 이 재판장에서 그를 위해 이 사랑이 변호한다.

, 하지만 어쩌랴! 재판은 재판이고, 국가는 법의 규칙에 따라 이 살인자를 사형에 처한다.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이여! 하지만 또한 그 자리에는 피해자도 있다. 아마도 피해자들은 그가 극형에 처해 죽기라도 바랄 것이다! 이 사랑 말고는 세상 누구도 이 잔인한 살인자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은 어떻게 허다한 죄를 덮고 살인자가 사형장으로 가는 길을 도울 수 있을까? 마지막 사형장으로 가는 순간, 관대한 해석을 내놓은 콩깍지가 씐 사랑은 마지막 복음으로 초청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14:9)

 

사랑은 이 복음을 읽어주며, 살인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살아서 주를 위해 살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주를 위해 죽으십시오.”

 

이 사랑은 끝까지 살인자의 편에 서서 그의 허다한 죄를 덮고 관대한 해석을 하고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초청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콩깍지가 씐 사랑이 어떻게 관대한 해석을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범죄의 현장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이 사랑은 범죄의 발견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선의 발견과 훨씬 관련이 있다.

국가는 악을 발견하고 처벌하기 위해 판사와 형사를 임명한다. 한편 사람들은 가난을 줄이고 고아들을 양육하고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연합한다. 물론, 이는 진실로 찬사를 보낼 만하다. 그러나 관대한 해석의 도움으로 허다한 죄를 덮기 위한 이 아름다운 기업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어떤 연합체도 조직된 적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관대한 해석을 통해서 사랑이 어떻게 허다한 죄를 덮는지 더 이상 발전시키지는 않겠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전13:7)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믿는 것과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이 관대한 해석자인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 관대한 해석을 위해 사용되는 두 가지 중요한 수단이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사랑의 대상이 변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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