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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13 누가 허다한 죄를 덮는가?

by 엉클창 2019. 8. 28.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설교자를 두고 있다. 이 설교자와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잔다. 이 설교자는 언제나 그의 주변에 있다. 언제나 그와 함께 있다. 그가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욕망이라고 불리는 이 설교자가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의 설교자에 굴복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본다.

반면, 모든 사람의 저 깊은 내면에 어디에서든 신중하게 현존하고 있는 비밀을주고받는 자가 있는 것도 확실하다. 그것은 양심이다. 사람은 아마도 세상에서 그의 죄를 숨기는 데에 성공할 수도 있다. 어리석게도 죄를 숨기는 데에 성공한 것을 기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정직해진다면, 그가 그 죄들을 드러낼 만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통탄할 만한 약점이요, 비겁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의 속에 있는 양심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죄를 숨길 수는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겨진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죄가 하나님께 숨겨진다면? 이것은 저 경우가 아닐지라도, 더 이상 죄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알자마자,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에서, 그는 또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안에는 또 다른 설교자가 있다. 그가 그토록 능력이 있고, 그토록 세심하고, 언제나 현존하면서 타락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 언약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나누는 설교자, 그분이 어디에서나 사람과 함께 한다. 그가 깨어있을 때도, 잠을 잘 때에도, 어디에서든,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고독 속에서도, 매일의 일터에서도, 거룩한 곳에서도, 이 비밀을 나누는 설교자가 그와 함께 한다.

그와 함께 지금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나눈다. 바로 이 순간에도 말이다. 아니면 중단한 채로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 나눈다. 아주 오래, 오래 전에 말이다. 아니, 아주 오래 전에 잊힌 게 아니다. 이 비밀을 나누는 자는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그 일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오래,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을 돌본다.

호라티우스(Horace)의 송가(Odes)에 의하면, 그의 말 뒤에 타고 있는 염려로부터 그가 도망칠 수 없듯, 사람은 이 비밀을 나누는 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다른 은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가슴에 꽂힌 화살에서 도망치기 위해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사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사슴이 더욱 맹렬하게 돌진할수록, 화살은 더욱 깊이 박힌다.”

그러나 오늘 당신은 저 도망치려는 헛된 시도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이 비밀을 나누는 설교자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당신은 실제로 그에게 저 설교단을 내어주었다. 고백의 시간에 설교하고 있는 것은 목사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진실한 설교자는 당신의 속사람 속에서 비밀을 나누는 자다. 목사는 애매하게 일반적인 것들로만 설교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내면의 속사람 속에 있는 이 설교자는 정확히 반대다. 그는 단순하고도 유일하게 당신에 대하여만 말한다. 당신에게, 당신 안에서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해도, 나는 실망시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누구이든, 인간적으로 말해, 거의 순수하고 결백하든, 이 비밀을 나누는 설교자가 당신의 속사람 속에서 당신에게 설교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숨기고자 하는 필요를 느낀다. 당신이 이 피난처를 발견하는 데에 수천 번씩, 수천 번씩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이 필요를 여전히 느끼고 있다.

, 내가 아무도 온 적도 없고 오지 않는 무인도로 도피할 방법을 알았더라면.

, 내가 도피할 수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도피처가 있었더라면. 심지어 나의 죄에 대한 의식조차 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있었더라면!

아무리 좁을지라도, 나와 나의 죄를 분할 수 있는 경계가 있었더라면!

아무리 작을지라도 갈라진 심연의 한 편에 내가 설 수 있는 곳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나의 죄에 대한 의식이 남을 수 있었더라면.

용서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용서가 나의 죄책감을 증가시켜도 나에게서 죄를, 죄에 대한 의식을 가져갈 수 있었더라면.

망각이 있었더라면!

하지만 안심하라. 왜냐하면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 보라, 모든 것은 새롭게 되었다!(고후5:17) 복음은 이교도에서 구했던 것과 구하는 것, 율법의 지배 아래 무익한 노력이었던 것과 무익한 노력인 것을 가능하게 했다. 구세주는 제단에서 팔을 벌리신다. 특별히 그의 죄 의식에서 도피하려는 도망자에게 팔을 벌리신다. 저지른 죄보다 더 악화된 죄로부터, 좀먹은 죄로부터 도피하려는 도망자에게 팔을 벌리신다. 그분은 팔을 벌리시며 말씀하신다.

여기 내게로 오라.

여기로 오라고 팔을 벌리며 이미 말씀하신 분이, 그의 말을 벌리시며, “여기로 오라고 말씀 하신 바로 그분이, 다시 말씀하신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그분을 믿으라! 당신은 팔을 벌리는 분인 구주께서 말장난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분이 의미 없는 상투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분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이 순간에, 그분이 여기로 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당신이 왔고 그분이 당신을 껴안는 그 순간에, 당신이 죄수가 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에, 바로 여기에, 거룩하신 자와 함께 있는 여기에는 어떤 망각도, 어떤 죄도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것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이 이것을 믿었더라면, 물론 여기에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사랑(그리스도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 그래,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애정 어리고 관대하게 심판할 수 있다 해도, 애정 어리게 당신의 죄에 대하여 그의 눈을 감을 수 있다 해도, 당신의 죄에 대하여 당신의 눈을 감게 할 수는 없다.

사랑스러운 말로, 동정어린 말로, 그가 당신의 눈에서 그 죄들을 완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정도로 당신에게서 죄를 숨길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상당히 죄를 숨길 수 있다.

, 하지만 실제로 당신에게서 죄를 숨기는 것, 문자 그대로 당신에게서 죄를 숨기는 것, 그리하여 바다 밑에 숨기는 것처럼 그 죄를 숨기는 것, 누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숨기는 것, 주홍 같은 죄가 눈보다 더욱 희게 될 때처럼 숨기는 것(1:18), 죄가 청결함으로 바뀌고 당신 스스로를 의롭다고, 청결하도고 감히 믿을 수 있도록 바뀌는 것, 이것은 그분만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인간은 어떤 권위도 없다. 당신이 믿어야 한다고 명령할 수 없다. 권위를 갖고 당신에게 명령함으로써 당신이 믿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을 가르치는 데에도 어떤 권위가 요구된다면, 이것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어떤 권위가 필요한가? 폭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라고 명령한 권위보다 더 큰 권위다.(8:26-27)

절망한 자를, 회개의 고통 가운데 죄를 망각할 수 없고 감히 그럴 수 없는 자를, 그의 죄를 쳐다보는 것을 멈출 수도 없고 감히 그럴 수도 없는 엎드린 회개하는 자를 명령할 수 있는 권위다. 그에게 그의 눈을 감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위다. 그가 죄와 죄과를 보는 곳에서 청결함을 볼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뜨라고 명령할 때, 필요한 권위다! 이 거룩한 권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그분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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