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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콩깍지가씐사랑

14 그분은 죽음으로 허다한 죄를 덮었다!

by 엉클창 2019. 8. 30.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자기 자신을 놓고 그의 몸으로 그를 완전히 가리면 누구도 그 뒤에 숨긴 사람을 볼 수 없듯,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거룩한 몸(holy body)”으로 당신의 죄를 덮는다.

그때 정의가 불끈 성을 낸다. 그리하여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당신 역시 회개로 고통당한다. 당신이 회개로 고통당할 때, 당신은 더 많은 죄를 발견한다. 심지어 당신 밖에 있는 정의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 스스로를 학대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진실로 만족이, 어떤 만족이 존재한다.

정의의 칼

만족을 만드는 자, 완전히 당신의 모든 죄를 덮고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 자, 정의가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그리하여 당신 속에 있는 회개가 보는 것을, 당신이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 자가 존재한다. 그분이 거룩한 몸으로 당신을 완전히 가렸기 때문이다. 그때, 정의가 시력을 상실하고, 회개가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문자 그대로 허다한 죄를 숨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위험의 순간에 염려하는 엄마 암탉이 자기 날개 아래에 병아리들을 모을 때, 병아리들을 덮을 때, 병아리들에게 피난처가 빼앗기기 전에, 적의 눈이 그들을 발견하기 불가능해지기 전에, 생명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분은 동일하게 당신의 죄를 숨긴다. 동일한 방식으로. 왜냐하면 그분도 염려했고, 사랑으로 무한히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사랑 아래에서 당신의 안전한 피난처가 빼앗기는 것보다 차라리 그분의 목숨을 버리는 편이 더 낫다. 그분은 목숨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분의 사랑 아래에서 당신에게 피난처를 보장하기 위해 그분은 생명을 버리셨다.

따라서 이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암탉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숨길 때 염려했던 것보다 그분은 무한히 염려하고 있는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이보다 무한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으로 숨겼기 때문이다.

, 이 영원히 안전하고, 영원히 보호받는 복된 피난처여!

작은 병아리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들이 숨겨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위험 가운데 있다. 엄마가 최선의 행동을 다했을 때에도, 사랑으로 그들을 위해 보호하다 생명을 잃는다면? 병아리들은 자신들의 피난처를 빼앗긴다. 이런 식으로 그분이 자신의 생명으로 당신의 죄를 덮었다면? 그분 역시 목숨을 빼앗기고 당신 역시 피난처를 빼앗긴다.

그러나 그분이 죽음으로 당신의 죄를 덮을 때는 무한히 다르다.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암탉이 목숨을 버리며 병아기를 보호했다면, 병아리들은 다시 위험에 노출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한 번에 결정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피난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분은 한 번 더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죄를 덮는 것은 단 번의 죽음으로 결정났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다. 그분은 당신의 죄를 덮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음으로 죄를 덮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을 제거할 수 있으나 죽은 자를 제거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피난처를 빼앗길 수 없다. 그때 정의가 불끈 성을 낸다면, 죽음의 형벌 그 이상을 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저 형벌이 지불되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당신의 피난처다.

이 얼마나 무한한 사랑인가!

사랑의 행위에 대한 논의가 있다. 수많은 행위들이 거론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나 사랑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있다면, 그때 거기에 어떤 유일한 행위가 존재한다. 놀랍게도, 당신은 지금 그것이 누구에 대한 것인지 안다. 그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하여 안다. 이 죽음이, 이 속죄의 죽음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것이 주의 만찬에서 선포된다.

설교단에서 선포된 것은 본질적으로 그분의 삶이다. 하지만 주의 만찬에서 선포된 것은 그분의 죽음이다. 그분은 온 세상을 위해, 우리 죄를 위해 단 번에 죽으셨다.(7:27) 그분의 죽음은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반복된다: 그분은 또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몸과 피로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약속을 받은 당신 말이다. 주의 만찬에서 그분은 피난처로 그분 자신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기념하며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

양심이 고소할 때,

율법이 심판할 때,

정의가 형벌로 괴롭힐 때,

무엇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배웠던 자들에게,

얼마나 안전한 피난처요, 복된 피난처인가! 그들은 결국 지쳐 절망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찾아야 할 유일한 피난처에서 안식을 얻었던 것이다.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기껏해야 당신에게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핑계거리를 줄 수 있다. 당신에게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로 남겨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당신에게 자기 자신을 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분이 당신에게 피난처로 자기 자신을 주신다.

그분은 당신에게 몇 가지 위로의 근거를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어떤 교리를 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그분은 자기 자신을 주신다.

밤이 모든 것을 덮으면서 퍼지듯이, 그분 역시 자신을 희생했고 그분이 구원했던 죄 많은 세상을 덮는 피난처가 되었다. 정의는 이 피난처로 침입하지 못한다. 햇빛이 착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듯이, 정의는 그런 식으로 부드러운 형태로도 들어올 수 없다.

아니,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는 이 피난처로 들어오다 부서지고 박살난다. 침입하지 못한다. 정의는 더 이상 당신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피난처로 온 세상을 위해, 또한 당신을 위해, 또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셨다.

 

나의 주, 나의 구세주여, 당신의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내가 나의 죄를 알고 나의 허다한 죄를 알 때,

하늘의 정의 앞에 나와 나의 삶을 향한 진노만이 있을 때,

여기 이 땅에서 내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때,

내가 도피하기 위해 이 땅의 끝까지 도망쳤던 이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을 때,

나를 더욱 깊게 절망에 빠지거나 미치게 만드는 무모한 시도를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나는 즉각적으로 당신께 피신할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애정 어리게 주셨던 저 피난처를 나에게서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의의 눈에서 나의 방패가 되어주실 겁니다. 이 정의의 사람에게서 나를 구원하실 겁니다. 그가 나를 괴롭혔던 저 기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실 겁니다. 당신은 감히 내가 피난처에 거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겁니다. 변화된 사람, 다른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정의에게,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저 사람에게 망각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떡과 포도주

경건한 독자, 당신은 오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에게 왔다. 그리하여 주의 만찬에서 이 사랑을 구했다. 당신은 바로 이곳에서, 당신은 당신의 죄에 대한 은혜로운 용서의 확신을 얻었다. 주의 만찬에서 당신은 이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그가 이런 감정을 품거나 당신을 향한 어떤 태도를 품는 약속과 동일한 방식으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니까. 아니, 당신은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약속으로서 이 약속을 받는다. 당신이 이 약속을 받을 때, 그리스도 자신을 받는다.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 이 표징 안에서, 그분은 당신의 죄에 대한 덮개(cover)”로서 그분 자신을 주신다.

그분은 진리이므로, 당신은 그분으로부터 진리가 무엇인지, 당신 자신에게 무엇이 남겨졌는지 찾는 것이 아니고,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만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8:31-32)

그분이 길이므로, 당신은 그에게서 당신이 가야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남겨진 길, 당신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만 당신은 이 길에 남는다.(14:6)

그분이 생명이므로, 그분에게서 넘겨받은 생명을 갖고 있고 그것을 홀로 옮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만 생명을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피난처이시다.

오직 그분 안에 거할 때에만, 그분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삶을 살 때에만, 당신은 덮개 아래에 있다. 오직 그때만 허다한 죄를 덮는 덮개가 존재한다. 이것이 주의 만찬이 그분과의 교제(communion)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것은 단순히 그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당신이 그분과 교제한다는 약속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교제다. 당신이 매일의 삶 속에서 보존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교제다. 당신 자신에게서 더욱 더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그분 속에서, 허다한 죄를 덮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삶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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