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대부분에 벌어지는 일들의 본질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제로섬 게임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윈윈 게임도 있지만,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전부 제로섬 게임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누군가에게 주면 그 사람 주머니에는 돈이 있지만 내 주머니에는 돈이 없다. 누군가에게 빵을 주면 나는 빵이 없고 받은 사람은 빵이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시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준만큼 나의 것은 사라지고 받은 상대는 내가 준 것을 갖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이치이다. 경제학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희소성”이다. 이 용어는 인간의 제한된 자원을 분배하는 데에 생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큼 자원이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시간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내가 준 만큼 내 것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주었지만 여전히 주고도 남아 있는 것이 있는가?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중복”이라고 부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 말이다. 그는 영원한 것은 그런 중복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영원한 것은 존재 방식이 다르다. 영원한 것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면, 매 순간마다 인간 안에 중복된다. 따라서 영원한 것은 준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고 언제나 항상 동일하게 남는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에 속한 것이지 덧없이 사라지는 시간적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이 행하는 것은 사랑 자체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준다. 하지만 준다고 해서 사라지는 제로섬 게임과 같지 않다. 사랑은 주고도 준 만큼 내 안에 남는다. 따라서 사랑은 같은 순간에 밖을 나가기도 하고 자기 자신 안에 남기도 한다. 그것도 “동시에.”
착각하지 마시라. 사랑은 주고 언젠가 다시 동시에 준 만큼 다시 보상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순간에” 사랑은 주고도 바로 그 순간에 나에게 준 만큼 여전이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영원한 것의 중복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랑이 담대함을 준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담대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현존하고 있는 곳마다 담대함을 퍼뜨린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담대함이 없는가? 아니다. 그가 담대함을 퍼뜨린다고 해서 담대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담대함은 동일하게 남는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나누어야 할 주제 말씀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으니라.(요일4:18)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는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여 쫓는 반면,
교활한 사람은 불안과 고통스러운 동요를 야기시키는 반면,
지배자의 현존은 무더운 공기의 무거운 압력처럼 억압적인 반면,
사랑은 담대함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은 담대함을 준다”라고 말할 때, 동시에 다른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이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는 것처럼”(요일4:17) 사랑하는 사람은 담대함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사랑은 심판의 날에 사랑하는 사람을 담대하게 한다. 이것이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 방식이다.
“사랑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엡2:4-5) 여기에서도 중복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구한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동시에 이것을 행한다.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을 구하고 다른 순간에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랑은 자기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담대함을 얻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사랑스럽게 담대함을 주는 것만 생각하고 죽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잊히지 않다. 절대 망각되는 법이 없다.
사랑하면서 스스로를 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
사랑하면서 스스로를 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생각하기 위해서 자신의 비참함을 잊는다.
사랑하면서 스스로를 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손실을 유념하기 위해 자신의 손실을 잊는다.
이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은 하늘의 하나님이다.
혹은 사랑이 그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일4:8)
사람이 사랑하면서 자신을 잊을 때,
어떻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 사람을 생각하신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바쁘다.
그는 자신이 잊히지 않기 위해 소리 지른다.
그는 커다란 소음을 생산한다.
그는 잊히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잊힌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자신을 잊지만,
사랑에 의해 기억된다.
그를 사랑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가 준 것을 동시에 받는 이유다.
자, 여기서 중복을 다시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하거나 그가 행하는 것이 된다. 그가 준 것을 갖고 있거나 준 것을 얻는다. 놀랍다. “먹을 것이 먹는 자로부터 나오는 것처럼”(사14:14), 그는 자기가 준 것을 얻는다. 그러나 아마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가 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야. 그것은 항상 그런 식이지. 사람은 확실히 그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주지 못하지.”
맞다. 이런 주장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가 준 것을 간직한 경우가 있을까? 혹은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을까? 사람이 줌으로써 그가 준 것과 같은 것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줌과 받음이 하나이고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럴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내가 준 것은 다른 사람이 받는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을 내가 받는 경우는 없다. 모든 것은 제로섬 게임이다.
이런 식으로 사랑은 그 자신 속에 중복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할 때 또한 진실하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 말씀은 사랑 자신의 말씀이다. 많이 사랑한 사람이 많은 죄를 용서받는다.(눅7:47)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에 대하여 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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