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침묵과 관대한 해석이 어떻게 죄를 덮는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침묵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해도 실제로 어떤 죄도 제거하지는 못한다. 관대한 해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죄의 양을 약간 감소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용서는 확실히 죄를 제거한다.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가장 치명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이전에 “창조의 허다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의 만드신 창조물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것을 다 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우주의 별들부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작은 세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한가! 이런 창조의 다양성을 발견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고 찬양받을 만한 일이지만, 용서와 허다한 죄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특징이 완전히 다르다. 용서는 허다한 죄를 덥고 용서받은 자의 죄를 제거한다.
콩깍지가 씐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이다. 아마 사람들은 콩깍지가 씐 사랑이 눈이 멀었다고 조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사랑은 믿음의 생각을 닮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나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들에 핀 꽃들, 움직이는 차들, 등등...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죄와 용서와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거의 깨닫지 못하는 믿음과의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죄와 용서와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용서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죄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가 어떻게 실제로 눈에 보이는 죄를 제거하는지 볼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관계는 이렇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콩깍지가 씐 사랑은 용서한 죄를 본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용서가 죄를 제거한다고 믿는다. 죄가 실제로 눈에 보일지라도 용서가 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죄가 눈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죄 또한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듯이, 콩깍지가 씐 사랑은 용서로 눈에 보이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둘은 모두 믿음이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라! 이 사랑은 볼 수 없는 것을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지라! 그는 진실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제거한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용서가 보기 드문가? 사람들은 가끔 용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지어는 용서하려는 마음을 품은 선량한 사람조차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야. 과연 그가 변할 수 있을까?
아, 용서의 도움조차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랑이 결핍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용서?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 없이 실천하는 용서를 보라.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얼마나 늦게 오는지. 얼마나 배짱을 부리는지. 이것은 이 용서에 아직 사랑이 없다는 증거다.
진실로 이 세계에는 죄를 감소시키는 대신에 눈에 띄게 죄를 증가시키는 용서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직 사랑만이, 물론 농담처럼 들릴 것이지만, 오직 콩깍지를 씐 사랑만이 용서함으로써 죄를 제거할 수 있는 재주를 부릴 수 있다.
만약 내가 용서를 방해한다면, 다시 말해, 내가 용서하기를 싫어하거나 용서할 수 있음으로 인해 거드름을 피운다면,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용서한다면, 믿음의 기적은 일어난다. 그때 모든 기적은 믿음의 기적이다. 곧, 용서받음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38:17)
이제 죄는 가리워졌고 용서받고 잊혀졌다. 하나님이 용서한 것에 대해 성서가 말한 바,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숨기셨다.” 물론 사람은 잊혀진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과 여태껏 안 적이 없었던 것만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잊었던 것, 그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잊는다는 것은 기억의 반대가 아니라 희망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희망한다는 것은 생각을 통해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고, 잊는다는 것은 생각을 통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제거하는 것을, 즉 말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또한 성서는 믿음은 희망하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다.(히11:1) 바로 이것이 희망의 대상이 실존하지 않는 이유이다. 희망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에 대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희망으로 실존을 부여받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잊는다고 할 때에, 잊는다는 것은 창조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창조한다는 것은 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고 잊는다는 것은 죄를 무로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눈으로부터 숨겨진 것을 나는 결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의 등 뒤에 숨겨진 것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용서한다. 그는 용서한다. 그는 잊는다. 그는 죄를 말소한다. 사랑 안에서 그는 그가 용서하는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가 그를 향하여 고개를 돌릴 때, 물론 그의 등 뒤에 놓인 것을 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등 뒤에 놓인 것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따라서 또한 이런 은유가 사랑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쉽다. 그러나 반면에 용서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등 뒤에 놓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다. 일반적으로 누군가 사람을 죽였을 때,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를 놓는 일이 쉽다. 그래서 무엇이 죄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용서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등 뒤에 놓는 일은 아주 어렵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허다한 죄를 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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