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 비난하는 댓글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비난의 댓글로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에 이르기까지 하는 뉴스를 듣는다. 이미 다 알다시피, 연예인들도 악성 댓글로 인해 자살한 경우도 있다. 악성 댓글과 악성 루머로 인한 억울함과 외로움, 우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가 “침묵”이다. 콩깍지가 씐 사랑은 침묵으로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남녀를 생각해보자. 때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가 숨겨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에게 비밀을 간직하자고 약속하는 순간을 가정해 보라. 거기에 우연치 않게 제 3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성실하고 다정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비밀을 간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연인의 사랑은 여전히 숨겨진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는 무심코, 우연하게 이웃의 죄와 실수를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그런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무심코 발견하게 될 거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허다한 죄를 덮는다.
침묵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침묵이 죄를 제거할 수 있나요? 침묵이 죄를 덮는 말든 허다한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이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하라. 이웃의 실수와 죄를 말하는 사람은 죄의 허다함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악성 댓글이나 루머도 이런 식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죄의 허다함은 그중에 일부를 숨기든 못 숨기든 간에 그만큼 큰 것이 사실일지라도, 내가 그것을 숨길 때, 나는 여전히 죄의 허다함을 숨기기 위해 나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문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소문이 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욱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소문이 죄를 얼마나 크게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이웃의 과실을 말하고 있는 소문은 허다한 죄를 증가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웃의 과실이 사실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옳은 것처럼 말하지 말라. 이웃의 과실에 대한 지식을 너무 경솔하게 대하지 말라.
따라서 사람은 이웃의 과실을 공개함으로서 너무 쉽게 죄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나 혹은 이웃의 과실을 말하는 사람은 허다한 죄를 증가시킨다. 사람은 이웃의 과실을 찾는 데에 익숙한 경우가 많다. 특히 소문이나 험담이 나돌게 되면, 더욱 호기심에 장난삼아 못된 마음으로 이웃의 잘못을 들추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일에 익숙해지게 되면 사람은 타락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다시 한 번 침묵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혹시 뜻하지 않게 이웃의 과실에 대한 잡담을 들을 수가 있다. 호기심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그런 잡담을 듣는다면, 터무니없는 말 혹은 하찮은 소리로 넘겨 버리라. 물론 이웃의 과실은 틀림없이 심각한 문제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심각한 문제를 호기심에 장난삼아 지껄이는 잡담은 타락의 징조다. 이웃의 과실을 말함으로써 사람을 타락하도록 돕는 사람은 물론 허다한 죄를 증가시킨다.
모든 인간이 불행하게도 이웃의 과실을 보는 경향이 매우 크다. 아마도 이웃의 과실을 보고 심지어는 그것들을 더 큰 것으로 말하기를 좋아 할 것이다. 소문은 그래서 커지는 것은 아닐까. 대중 매체도 긍정적인 보도보다 부정적인 사건의 보도가 더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이웃의 악한 측면을 말하고 싶어 하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잠시나마 청중들을 끌어 모으려는 수작은 아무리 온화한 용어로 말한다 해도 일종의 신경쇠약이다.
확실히 이웃의 잘못을 말하고 싶어 하는 신경쇠약적 충동은 타락이다. 이런 사람은 이웃의 과실을 발견함으로써 남의 이목을 사로잡기도하고 심지어는 이런 일에 흥분과 황홀감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진리의 수호자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신경쇠약의 충동만큼이나 충분히 해로운 것은 가장 끔찍한 규모로 이런 사람 속에 싹트기 시작한다. 이웃의 잘못을 말하고 싶어 못 견디는 충동! 진실로 어떤 강도도, 어떤 도둑도, 어떤 폭행범도, 어떤 범법자도 이런 인간만큼이나 깊이 타락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가능하면 가장 큰 소리로, 진리의 어떤 말씀도 들리지 않을 만큼이나 크게, 이웃의 과실을 선포하는 사역을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과업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의 잘못을 가장 큰 소리로 외친다.
그는 진리를 지키는 사명자가 되기 위해 이웃의 과실을 먼저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는 이웃의 과실, 이웃의 나약함, 이웃의 죄를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침투하지 못한 모든 곳까지 침투한다. 그는 이 오염된 지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원한다. 그는 심지어 아직 철이 들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도 이 지식을 강요한다.
그가 말하는 이웃에 대한 악이 사실일지라도, 어떤 범법자도 이 사람만큼이나 타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진지함을 가진 사람이 그가 말한 이웃의 악이 무조건적으로 옳을지라도, 그의 삶을 이 구역질나는 진리에 봉사하고 이웃의 악을 보고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마6:13)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진실로 시험에 빠지는 일이 일어난다면, 오직 단 하나의 은혜이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여, 세상이 나의 죄와 허물을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죄를 짓고,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죄 위에 또 죄를 짓고 날마다 새로운 죄를 더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처해 있는 모든 환경이 착각으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실존 자체가 착각으로 변해 있다. 그래서 착각은 “모든 것은 별 것 아니다. 그것은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할 만하고 기특하다”라는 의견을 제시할 만큼 사람을 강하게 한다.
아! 세상이 범죄라고 부르지 않는 범죄가 있다. 세상은 오히려 상을 주고 거의 존경하다 시피하는 범죄다. 이웃의 허물을 들추고 전달하는 험담꾼의 범죄다. 그러나 나는 매년마다 이 두렵고 셀 수 없이 많은 범죄의 짐을 쌓아가는 은퇴한 험담꾼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차라리 회개한 살인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 왜냐하면 험담꾼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이웃을 비방하고, 사람들을 무덤으로 처넣고, 가장 친밀한 관계를 손상시키고, 가장 순진한 위로자들을 해치고, 철부지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고, 젊은이와 노인들을 타락시키고 방황하게 한다. 다시 말해, 험담꾼은 가장 활발한 상상력도 결코 개념을 생성할 수 없을 정도의 양으로 이 두려운 범죄의 짐을 퍼트린다.
나는 이 두려운 범죄의 짐에 대하여 회개할 시간조차 없다. 왜냐하면 시간은 새로운 범죄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범죄는 나에게 돈, 영향력, 명성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즐거운 삶을 보장 해주기 때문이다!
방화의 범죄와 연관시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 집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방화했는지 아닌지를 구별한다. 또한 이에 입각하여 범죄의 형량은 결정된다. 그러나 말하자면 사회 전체에 불을 지른 험담꾼에서는 이런 방화가 범죄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역병을 막기 위해 격리조치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흑사병보다 더 악질인 험담은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타락시키지만 이런 악질 역병에 우리 모두는 집 대문을 활짝 열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전염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전염을 몰고 오는 사람을 손님으로 환영하며 기쁘게 인사까지 한다!
그때, 당신이 이웃의 허물을 말함으로써 허다한 죄를 어떻게 증가시키는지 고려한다면, 이웃의 허물에 대하여 침묵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이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말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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