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orks of Love: Some Christian Deliberations in the Form of Discourses
- Kjerlighedens Gjerninger. Nogle christelige Overveielser i Talers Form
- 한국어 번역: 사랑의 역사, 임춘갑 역
- 1847
- KW16, SKS9, SV9
네 번째 시기: 두 번째 저술의 서막(1846-48년)
사랑의 역사Works of Love
일단 <사랑의 역사>는 "마음의 청결은 한 가지를 품는 것이다"라는 작품과 그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이는 <다양한 정신의 건덕적 강화>의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를 참고하라.) 두 작품 모두 신학적 주제보다는 윤리적인 주제를 강조한다. 부제를 보면 "성찰deliberations"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성찰"과 "건덕적 강화"를 구별한다.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열여덟 편의 건덕적 강화"를 참고하라.) 성찰은 행동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깨우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성찰은 "잔소리꾼gadfly"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건덕적 강화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고, 부드럽게 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다.
키르케고르 일기에는 <사랑의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뿐만 아니라, 그의 전체 저작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논평이 있다. 따라서 독자는 저자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최고의 소개를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성격, 목적, 가장 좋은 접근 방법이다. 이 작품과 다른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에 접근할 때, 자기 서명이 들어간 작품과 익명의 작품 사이의 차이와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 서명이 들어간 작품은 훨씬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익명의 작품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편으로, 기독교 강화Christelige Tale와 기독교 설교 사이에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건덕적 강화opbygglige Tale과 성찰deliberation, Overveielser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기독교 강화는 어느 정도 의심을 다룬다. 그러나 설교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권위를 통해서 영향을 미친다. 이 권위는 성서와 사도들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설교에서 의심을 품는 것은 이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의심을 아무리 잘 다룬다 해도 말이다.
나의 기독교 강화의 서문은, 따라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포함한다: 고난당하는 자가 또한 많은 생각들로 인해 제멋대로 되었다면.
설교는 목사(안수)를 전제한다. 기독교 강화는 평신도를 전제한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반대는 의심에서 나온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기독교의 반대는 불순종, 순종의 혐오, 모든 권위에 대항하는 반역으로부터 나온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 세력과 싸울 때, 허공을 치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상 반역과 싸운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의심과 싸웠기 때문이다.[#1 Papirer VIII1 A6 (D629)]
다시, 건덕적 강화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더 일반적인 범주에 있거나, 더 특별히 기독교적인 범주에 있다. 「사랑의 역사」는 키르케고르가 “몇 개의 기독교 성찰nogle christelige overveielser이라고 부른다. 건덕적 강화와 기독교 성찰의 차이는 결정적인 범주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있고 어조는 그 해에 쓰여진(1847년) 다른 기록물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사랑의 역사」도 1847년에 출판되었다.
성찰은 이미 주어지고 이해하고 있는 한정된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찰은 감동주고, 달래주고, 자신감을 갖게 하고, 설득하기보다 사람을 일깨우고 선동하고 생각을 날카롭게 한다. 성찰의 시간은 행위 이전 상태에 있다. 따라서 성찰의 목적은 모든 요소들을 움직이도록 준비시키는 데에 있다. 성찰은 “쇠파리(gadfly, 잔소리꾼)”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찰의 어조는 건덕적 강화의 어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건적적 강화에서는 감정적으로 쉼이 있지만 성찰은 좋은 의미에서 감정적으로 조급해져야 하며, 진취적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는 필연적이고 희극의 훨씬 더 중요한 재료이다. 생각을 더 명쾌하게, 더욱 놀랍게 한다면 이야, 잠시나마 웃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에 대한 건덕적 강화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들을 설득하여 사랑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런 경우가 아니다. 따라서 “성찰”은 먼저 그들을 지하실에서 데리고 나와야 하고, 그들을 불러 편안한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래서 진리의 변증법으로 뒤죽박죽 생각하게 해야 한다.[#2 Papirer VIII1 A294]
같은 해에 일기장의 다른 곳에서,[#3 Papirer VIII1 A308] “성찰”이라는 용어가 기독교 강화들 중의 하나에 대한 소개에서 이미 어떤 실마리로 사용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가 지적했다시피, 성찰한다, 심사숙고 한다(at oveveie)는 “무개를 달다(at veie)”라는 단어와 생각으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우리는 물건을 저울에 단다. 그러나 저울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 저울은 이편이든 저편이든 더 큰 무게에 반응할 뿐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람이 무게를 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에 비유적으로 쓰일 때, 이것은 성찰하고 심사숙고 하는 것을 의미하며, 공평하게 무게를 다는 행위 그 이상으로 인간이 무게를 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그는 심사숙고한다. 그는 무게를 단다는 사실보다 더 고차원적이다. 그는 무게를 다는 행위 그 이상으로 올라가, 선택한다. 그때, 이 말을 단단히 붙잡기만 한다면, “심사숙고하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본질을 언급하고 있고, 그 말의 구성과 탁월성을 언급하고 있다고 우리는 타당하게 말할 수 있다. 무게를 다는 데 있어서는 두 개의 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심사숙고하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무게를 달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가 두 개의 크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 구성되어야 한다. 이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일시성(temporality)과 영원(eternity)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으로 이해할 때, 일시성과 영원은 무게를 달아야만 하는 두 개의 크기이다. 그러나 심사숙고하기 위해서, 사람은 결국 스스로 제 삼자가 되어야 하거나, 두 개의 크기와 관련하여서는 세 번째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다: 즉, 그는 무게를 달고, 심사숙고하고, 선택한다.[#4 고난의 복음 6장을 참고하라]
“성찰”을 쓰면서 키르케고르 자신이 언급한 의도와 <사랑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빈번한 언급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이 작품이 독자와의 관계에서 소크라테스적이라고 정당하게 간주할 수 있다. 곧, 이 작품은 기독교 윤리적인 범주 안에서 자기 시험을 위하여, 자기 자식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는 주관적이고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이다. 때로는 아주 끔찍하게 객관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업이란 사실 자기 자신에게 객관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주관적이어야 한다.”[#5 Papirer VIII1 A165(D676)]
따라서 독자를 위한 이 작품의 최초 목적은 자신의 주관성에 대하여,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개관적이 되도록 돕는 데에 있다.
키르케고르가 그의 전체 저작을 자신의 본질적인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본 것처럼, 읽는 독자들에게(단 몇 명만 있을지라도[#6 Papirer VIII2 B73, p. 131: “우리의 노력이 진실로 이 의미에 대하여 무관심하기에, 나는 감히 이 책을 사랑의 한 행위라고 부른다. 사랑이 아름다운 만큼 아름답게 하기 위해 정직하게 행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그가 사랑을 위해 설득되어지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이 책의 독자가 있든 없든,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과업은 독자가 없다고 해서, 덜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니다.”]), “저 단독자”에게 그의 근본적인 교육에 있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는 적절하게 언급하자면 자서전적이다. 키르케고르의 삶의 실마리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작품과 다른 작품과의 역사적-심리적인 접근을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7 Papirer X1 A161(D890): “나는 아직까지 나 자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의 말미에도 이런 종류의 것은 아무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는 단순하게 익명의 저자에게 책임을 떠맡겼다. 나는 그들의 사상에 대하여 (내가 이해했던 대로) 가정하여 말할 뿐이다.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에서 발견되고 있는 익명의 작품들의 구조와 관련된 설명은 제 삼자에 의한 것이다. <사랑의 역사>의 결론(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사랑의 행위)은 나에 대하여 직접적인 아무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최고의 이기주의자가 사랑을 찬양하고 있는 임무를 맡는 자이어야 한다.’ <두 시대(The Two Ages)>에 대한 비평에는 나에 대한 작은 암시가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소설에서 직접 배웠을지라도, 그것 역시 직접적인 전달이 아니라, 숨겨졌다.”]누군가의 삶, 그 삶의 모습과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사랑의 역사>의 원고를 끝낼 당시 있었던 키르케고르 자신의 말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라 한다 해도,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나는 지금 더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나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갈 필요성을 느낀다. 나 자신의 이해할 때,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감으로써 말이다. 나는 그 지점에 남아 있어야 하고 내면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8 Papirer VIII1 A250(D694)]
성찰의 지적 작업과 더 큰 자기 지식에 이르는 것은 저자에게는 쉴 수 있는 지점이 아니다. 그것들은 또한 결론 짓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무언가 변화를 지시하는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감히 베를린으로 갈 수 없다. 그것은 낙태를 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나는 조용하게 남아야 한다. 더 열심히 일하려는 것도, 새로운 책을 시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 자신에 대하여 이하하려고 할 뿐이다. 진심으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나의 우울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한다. 이것이 나의 우울을 제거해야만 하는 방법이고 기독교를 더욱 나에게 가까이 가져오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나는 지적인 작업으로 나의 우울을 방어해왔다. 그렇게 우울을 멀리 두었던 것이다. 지금, 무슨 죄가 있든 용서에서 하나님께서 잊는다는 믿음에서, 나는 스스로 그것을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기분을 전환시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분께서 그것을 잊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는 법을, 따라서 스스로 용서에서 감히 그것을 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9 Pairer VIII1 A250(D694)]
이 작품에 대하여 이런 종류의 윤리-종교적인 의도를 이해할 때, 혹은 이 성찰이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해할 때, “너 자신처럼”이라는 구절이 있는 부분에서 키르케고르가 처음에 사용하고 있는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
“어떤 씨름 선수도 이 명령이 자기 사랑으로 포위되듯이 그렇게 상대에게 포위될 수 없다.”
이 말이 전체 과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찰의 발전은 비상구를 닫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이 차이를 날카롭게 하고 개념과 실존적인 지위에서 벌거벗긴 함축성을 남길 때, 애매모호한 말을 중단시키고 변명을 폭로한다. 독자는 이 작품이 왜 이렇게 긴지 이유를 알게 되고 “그가 왜 이걸 말했지? 이것을 왜 해야만하지?”라고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독자 개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는 독해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식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은 저자의 묶음으로 된 의견의 제시가 아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독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고 그를 이 작품으로 포위한다.
이것이 우리가 번역할 때 “조금 더 쉽게” 하기위해 구절과 문장들을 해체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는 이유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쉽고 피상적인 독해가 불가능하도록, 심사숙고하는 독해에서 이것이냐/저것이냐를 요구하는 일이 없도록, 읽는 동안 착각이 스며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생과 형식을 발전시켰다. 내용과 적절한 형식 모두 저자가 희망했던 대로 읽고 있는 독자에 의해 가장 잘 평가되고 적용된다. (“나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읽고 있는 독자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큰 소리로 읽는 것은 우리가 저자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산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에 의해 우리의 성찰로 고양될 뿐이다.
<사랑의 역사>는 독자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독자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내용은 긍정적인 사랑의 윤리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저서인 <마음의 청결>과 상호보완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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