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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기도

04 키에르케고어의 기도

by 엉클창 2019. 8. 6.

해제

이 기도는 누가복음 747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적게 사함을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는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위로의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정의가 심판입니다. 정의는 가혹한 심판이요 사랑은 너그러움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심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심판한다 해도, 사랑은 너그러운 심판이지요.

하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가혹한 심판이라는 겁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보다 더 가혹합니다. 바벨탑에서 언어의 혼잡보다 더 가혹한 심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보다 더 가혹한 심판입니다. 바로 이 가혹한 최후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죄 없는 죽음의 심판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이 심판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이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심판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자가 많은 죄를 지었다. 따라서 그의 죄가 너무 크고, 너무 많아 용서받을 수가 없다.”

아니, 이 사랑의 심판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적게 사랑한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정의가 심판입니다. 정의가 칼을 휘두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랑, 다시 말해, 이 사랑을 거부한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의가 심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랑이야 말로 심판입니다.

이 기도는 이런 겁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이 심판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우리가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께 피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랑,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랑, 이 사랑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숨을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랑의 긍휼을 거부한다면, 이 사랑의 긍휼을 믿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암담합니까? 주님을 적게 사랑함으로 죄를 지은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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