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진실로 성령님이 우리를 밝히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겸손하게 눈을 내리뜬 채로,
우리가 멀리, 더 멀리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탄식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그때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하신 말씀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에게 하신 말씀이,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하소서.
기도 해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이 말씀에 의하면, 세리는 멀리 서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홀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 세리는 멀리, 사람들로부터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홀로 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성서의 말씀에 따르면, 바리새인은 “따로 서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멀리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진실로 따로 서 있었다면, 그 또한 멀리 서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따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가 따로 서 있었고 “그가 다른 사람과 같이 않음”을 감사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무리 속에 있을 때, 물론 그것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바리새인의 교만이란 교만하게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그들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교만하게도 따로 서 있기 위해 이 생각을 붙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따로 홀로 있는 것은 더욱 아니죠.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 있습니다. 그럼 그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시험에 빠지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까요? 그가 인정했던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잊었습니다. 그는 홀로 있었습니다. 그는 홀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의식하며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다른 많은 세리가 있었다는 것도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는 마치 유일하게 혼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의로운 자 앞에서 자신의 죄와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멀리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스스로 죄인이었습니다. 이 거룩함과 홀로 있기, 이것은 얼마나 무한히 멀리 있는 겁니까!
그는 감히 하늘로 그의 눈을 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눈을 아래로 떨구었습니다. 심지어 물리적으로도 무한한 것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람이 눈을 고정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효과를 현기증이라고 부릅니다. 그때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로 홀로 있는 자가 그의 눈을 뜬다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게 될 것이고 다른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확실히 그때 그는 눈을 떨구는 법을 압니다. 혹은 아마도 그는 눈을 들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고 눈을 떨구었을 것입니다. 그는 눈을 아래로 떴고, 그의 비참함을 보았습니다.
졸음이 피곤한 자의 눈꺼풀을 짓누르는 것보다 더욱 무겁게, 죽음의 잠보다 더욱 무겁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개념이 그의 눈을 짓눌렀습니다. 피곤한 자처럼, 진실로 죽어가는 자처럼, 그는 눈을 위로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그의 눈을 향하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그는 눈을 내리뜨고 “내면”을 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을 간파하는 통찰력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세리를 봤던” 바리새인처럼 옆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그가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읽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세리입니다. 물론 기도하러 성전으로 두 사람이 갔습니다. 성서는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 바리새인이 세리와 함께 동행하여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성전에 함께 있었을지라도, 가능한 한 멀리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세리도 멀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은 세리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세리, 아, 구별된 의미에서 당신은 이 세리라 불리기에 얼마나 합당한 자입니까? 세리는 바리새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집으로 갔을 때, 그는 이 세리가 성전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바리새인이 그 성전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랑스럽게도 이 세리를 보면서 만족을 찾았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눈을 아래로 떴고, 그의 눈은 내면을 향했고,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은 성전에서 누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까?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본 겁니까, 세리를 본 겁니까?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세리처럼 의롭다 함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까? 주여, 세리에게 한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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