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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기도

07 키에르케고어의 기도

by 엉클창 2019. 8. 10.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께 모든 것을 올바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한 가지만 당신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사랑이 더욱 커지도록,

그 사랑을 더욱 불태울 수 있도록,

그 사랑을 순결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이 기도를 듣고 계신 그리스도시여,

잔인하게도,

누가 당신을 사랑하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는,

그저 사랑의 대상일 뿐인,

그런 사랑이 아닌 당신이여.

 

분노하여,  

누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질투하는,

그저 심판일 뿐인,

그런 사랑이 아닌 당신이여.

 

오, 주여, 아닙니다.

당신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두려움과 염려만 불어넣었을 겁니다.

 

그때, 

“당신께로 가는 것”(마11:28)은 무서운 일,

“당신께 거하는 것”(요일4:16)은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그때,

당신은 두려움을 내쫓은, 

온전한 사랑이 아닐 겁니다(요일4:18)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사랑 안에 거하시는 주여,

 

당신을 사랑한 그 사랑을 먼저 키우시고,

당신을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격려하신,

당신은 그런 사랑이십니다.


 

기도 해제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합니다.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식사에 초청한 겁니다. 일종의 파티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자리는 바리새인이 마련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초청받지 않는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등장한 겁니다. 성경은 이 여자를 “죄인인 한 여자”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이 여인의 등장으로 파티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즐거운 날에 어떤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바리새인은 제 정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은 이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도 여자가, 죄를 짓고 건방지게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역겹다. 역겹고 더러운 자만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세상의 저 구석진 곳에 숨어야 하는 자가!

 

그녀는 바리새인 집에 있는 거룩하신 자에게 갔습니다. 그것도 저녁만찬 때. 저녁만찬 때라니! 당신이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묵상한다면, 몸서리칠 것입니다. 당신은 그녀를 따라가기를 피하고 싶을 겁니다.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쉽게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계속적으로 이 모든 일들이 저녁만찬 때 일어났다는 것을, 이것이 “초상집”이 아니라, “잔치집”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까요. 

저녁만찬 때에 그녀가 들어갑니다. 그녀는 자신의 옥합을 가져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저녁만찬 때에 적합할 수 있지요. 그녀는 손님 중의 한 명의 발아래에 앉습니다. 게다가 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녁만찬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저녁만찬을 방해한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여자가! 그러나 저녁만찬이 그녀를 방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죄인인 이 여자를, 확실히 몸서리치지도 않은 채, 움츠러들지도 않는 채, 저녁만찬에 나아온 여자를 말입니다. 심지어 고백하러 나온 여자를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증오했습니다. 즉, 그녀는 많이 사랑했습니다. 

오, 다른 어떤 것보다 죄의 무거운 비밀은 사람을 더욱 무겁게 압박합니다. 하지만 더욱 무겁게 하는 유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고백입니다. 오, 죄의 끔찍한 비밀은 다른 어떤 비밀보다 더욱 끔찍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공감은, 인간의 감정은, 인간의 이성은, 이 어려운 탄생을 지원하고 경감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발명했습니다. 예, 고해성사입니다. 모든 것이 조용한 거룩한 장소에서, 진지한 엄숙함이 있는 거룩한 장소에서, 모든 것이 무덤 속의 침묵과 같은 침묵이 있고, 죽은 자의 심판과 같은 관대함이 있는 더욱 숨겨진 공간에서, 죄인은 죄를 고백할 기회가 제공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의 끔찍한 비밀보다 더욱 무거운 죄의 고백, 바로 이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고해성사라는 거룩한 장소를 고안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에 대한 시선은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아무도 쳐다보는 이도 없지요. 아이고 그렇지요, 압니다. 죄인이 그의 양심을 가볍게 하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더 가볍게 하기위해 고안한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의 공감이 고안한 마지막 장치는 심지어 그런 고백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게 하는 것, 그렇게 숨어서 듣는 자도 필요로 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죄의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비밀리에 하기만 하면 됩니다. 조금 편안해졌죠?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세상에 이런 기독교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싼 티 나는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리하여 죄는 속사람 속에 숨겨진 채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만찬 때, 이 여인! 저녁만찬 자리는 어떤 숨겨진, 외딴 장소가 아닙니다. 어떤 희미한 불빛도 아닙니다. 무덤 사이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도 아닙니다. 듣는 자는 침묵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폐, 어둑어둑함, 외진 곳 그리고 죄를 고백하는 자와 관련된 모든 것이 어떤 완화라면, 어떤 경감이라면, 저녁만찬은 가장 잔인한 고안 장치입니다. 그때 이 잔인한 자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가 이런 잔인한 방법으로 죄를 고백하게 한 겁니까? 그것도 벌건 대낮에 잔치 자리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좀 청원합니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고백하지 않게 말입니다. 그녀에게 너무 잔인합니다. 그녀에게 관대할 수 있도록 우리가 청원하여 진정시켜야 할 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잔인한 고안 장치도 이렇게 잔인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구 입니까?

그녀 홀로 그것을 고안했습니다! 죄인인 그녀가 말입니다. 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잔인한 자와 고문당하는 자는 다릅니다! 그녀는 스스로 이 고문을 고안했습니다. 그녀 스스로 잔인한 자였던 겁니다. 그녀는 자신을 증오했습니다. 즉, 그녀는 많이 사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와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도 그녀가 속으로 이런 고백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자에게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수치를 당하면서 그녀가 그 자리에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복음에 의하면, 그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열망은 어떤 수치도, 어떤 죄에 대한 염려조차 그녀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과 같은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오직 이 사랑만을 구하게 하소서!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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