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사신 신학”을 다룹니다. 대표적인 신학자가 있다면, 알타이저[#1 토마스 요나단 잭슨 알타이저(Thomas Jonathan Jackson AltizerAltizer, 1927년 9월 28일 - )는 사신신학자이다.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개념인 신의 죽음과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 으로 자신의 조직신학을 세웠다.]와 테일러[#2 마크 C. 테일러 (Mark C. Taylor, 1945년 12월 13일 - )는 신학, 철학, 미술 및 건축, 미디어, 기술, 경제 및 자연 과학에 관한 20권 이상의 책을 출판 한 종교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이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신학자이다. 1968년 웨슬리안 대학교 (Wesleyan University) 를 졸업 한 후 하버드 대학교 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3 년 윌리엄스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2007 년에 윌리엄스 대학교에서 콜비비아 대학교 로 옮겨 2015 년까지 종교학과 학장으로 지냈다.]가 있습니다. 이런 신 죽음의 신학을 말하는 사람들이 키르케고르를 연관시키고 있으니 오해가 불거질 수밖에 없지요.
알타이저. 이 사람은 니체의 “신 죽음”을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신, 초월적 신이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초월적인 신이 죽으면 그 신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타이저의 사신신학의 핵심은 “내재 신론”입니다. 신의 초월성에 대한 부정입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신학이 아닙니다.
테일러. 이 분은 키르케고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인물인데요,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세는 드셨지요. 1945년 생입니다. 이분 역시 사신신학을 발전시킨 인물인데, 대표적으로 키르케고르를 오독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의 평가가 아니라, 학계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카푸토입니다.
한 마디로, 알타이저가 초월적인 신의 죽음을 말했다면, 그래서 “내재 신론”을 주창한 인물이라면, 테일러는 내재된 신을 한 번 더 죽입니다. 부정의 부정이죠. 내재된 신을 부정하고 나면, 남는 건 “신 존재의 부재”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고 있는 해체입니다. 나중에 데리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제가 볼 때, 희한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테일러는 헤겔과 키르케고르로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이렇게 키르케고르로 박사학위 받는 분이 키르케고르를 끌어들여 “내재 신론”을 주장하며 신학을 하고 있으니, 이런 논의를 출발시킨 헤겔과 키르케고르는 죽일 놈입니다. 아마 쉐퍼가 봤을 땐 그랬겠지요.
제가 볼 때, 키르케고르를 올바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철학적 신학에 접목시킨 인물을 뽑으라면, 카푸토(John D. Caputo)입니다. 이 사람은 사신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초월적 신”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 분 역시 “해체”를 그의 신학 방법론으로 갖고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정통 신학을 고수하는 분들에게는 수용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카푸토 역시 키르케고르를 심층 깊게 연구한 사람이죠.
그렇다면, 카푸토는 어떤 의미에서 “신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하자면, 카푸토는 “전능한 하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결정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다. 결국, 전능한 하나님이라기보다 “약함의 하나님”만 남게 된 겁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 약함의 하나님이 키르케고르의 역설입니다. 이 약함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믿음의 도약”은 필요하죠.
이렇게 사신신학의 중심 축에는 헤겔과 키르케고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신 신학은 해석의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봅니다. 사신 신학이라고 해서 그냥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님을 부정하는가에 따라서 이 분야도 주장하는 바가 다양하니 이점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단지 가이드라인만 제공하는 것뿐입니다.
앞으로 시간 나는 대로, 키르케고르와 영향 받은 인물들에 대해 한 명 씩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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