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번에 키르케고르에 대한 오해로 칼 바르트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불트만[#1 루돌프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년 8월 20일-1976년 7월 30일)은 독일의 개신교(루터교) 신학자이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의 신약학 교수로 30년 동안 재직했으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서의 비신화화를 시도한 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름을 따라서 불트만 학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을 소개한다. 불트만은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하이데거와 키르케고르가 강조하고 있는 실존의 상황은 “불안”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하고 있고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것이 불안이다.
2. “불안”은 두려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키르케고르가 불안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에 데이비드 흄이 쓴 「종교의 자연사」에서 주장한 “두려움”에 대한 반격인 것처럼 보인다. 흄은 종교의 기원을 “두려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에 천둥과 번개, 태양, 폭풍 등 수많은 자연의 사물과 동물들이 인간들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었고, 이 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결국 종교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3. 그렇다면, 불안과 두려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려움은 대상의 문제다.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사라지면, 그 대상과 함께 두려움도 사라진다. 하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의 개념」에서 보면, 불안은 “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현실성”이다. 다시 말해, 불안은 저 무한한 가능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주장으로 종교의 기원은 두려움이 아니라 “불안”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안의 개념」을 읽어보라.
4. 이런 점에서 불안은 인간이 처한 실존적 상황이다. 동물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물은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어도 불안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불안은 “자유로운”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존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고, 불트만의 신학이다. 따라서 이 신학과 철학의 기저에는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이 중심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이런 점에서 불트만의 신학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위로부터의 신학이 칼 바르트의 신학인 반면, 아래로부터의 신학 방법론을 택한 불트만의 신학은 불안에 대한 관심으로 볼 수 있다. 둘 다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 쪽에서는 위에서 신학을 하고 한 쪽에서는 밑에서 신학을 했던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한쪽면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한쪽은 하프니엔시우스가 저자인 「불안의 개념」을 강조했고, 한쪽은 요하네스클리마쿠스와 안티클리마쿠스가 저자인 「그리스도교의 훈련」, 「비학문적 후서」와 같은 책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6. 첫째 문제점. 일단 두 사상가 역시 가명의 저자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로부터의 신학을 했든,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했든, 어떤 것도 키르케고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강화집을 제대로 읽었다면, 다른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실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를 본받음”만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7. 둘째 문제점.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은 엄밀히 말해, “염려”다. 왜냐하면 성서의 언어가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장의 염려에 대한 이야기는 키르케고르 강화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구절과 「불안의 개념」에 나와 있는 “불안”과 연결 짓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으나, 강화(설교) 제대로 보라. 학회에서 발표를 해야 하거나,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려는 분에게는 굉장한 자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에게, 구원이란 “염려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곧,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이고,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염려)란 원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8. 첫째 결론. 기회가 된다면, 학회에서 발표할 의향은 있으나, 박사 학위도 없는 나를 부를지는 미지수다. 불트만, 하이데거, 바르트에게서 실존 문제의 해결책은 앙금 없는 찐빵과 같다. 그렇다면, “염려(불안)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 키르케고르에게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외에는 없다.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9. 둘째 결론. 불트만이고 바르트고 한국 교단에서,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이다. 아마 이 신학자들은 죄인 중에 죄인이고 기독교를 타락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는 이런 죄인의 아비인가?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목사님이나 교수님이 계시다면, 편견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탐구하기를 부탁한다. 가명의 저작들이 어렵다면, 강화집부터 읽기를 권한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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